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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국가상징공간 조감도. 서울시 제공


이세영 | 전국부장

느닷없다. 아니 고약하다. 가만있자니 찜찜하고, 정색해 비판하자니 의도가 빤히 보여 저어된다. 선례가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경복궁 옆 이승만 기념관’ 건립의 군불 때기에 한창이던 지난 2월의 일이다. 야당이 오 시장을 비판하자 서울시가 이례적으로 ‘대변인 성명’을 내 역공했다. ‘민주당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낸 건국 대통령의 업적이 그렇게 싫은가?’ 이런 식의 싸움 로직을 가진 시장과 참모들이니, 광화문 앞 초대형 태극기 게양대 건립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쉬 짐작된다. ‘태극기가 상징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그렇게도 부정하고 싶은가?’

국기 게양대와 부속 시설 하나를 세우는 데 드는 비용이 무려 110억원이다. 다 국민 세금이다. 게다가 광화문 일대엔 이미 세종대왕상, 이순신상, 경복궁, 정부서울청사, 세종문화회관, 청와대 등 국가 정체성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차고 넘친다. 심지어 ‘재조지은’의 혈맹국인 미국 대사관까지 있다. 여기에 100m 높이의 태극기 게양대를 추가하면 안 그래도 뜨거운 한국인의 국가 자긍심이 비등점을 향해 치솟기라도 한단 말인가.

오노레 도미에, ‘공화국’, 1848.

오 시장의 ‘광화문 태극기 게양대 구상’을 두고 일각에선 국가주의, 전체주의적 발상이라 비판한다. 동의할 순 없어도 이해할 만한 구석은 있다. 근대국가를 발명한 유럽인들 머릿속에 국가(공화국)는 자녀(국민)를 먹이고 교육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오노레 도미에(1808~1879)의 1848년 작 ‘공화국’에 나온 그 모습이다. 이들은 시민의 ‘애국 의무’가 국가로부터 제공받는 인간적인 삶의 혜택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봤다. 하지만 천황제 파시즘에서 이승만 반공국가, 유신, 5공화국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는 한국인 다수의 뇌리에 국가를 군림하고 학대하는 ‘억압적 아버지’의 이미지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이런 탓에 한국의 진보세력에 ‘애국’은 오랫동안 기피의 언어였다.

그러나 ‘애국’이란 가치를 곧바로 국가주의·전체주의와 등치시키는 것도 지나치다. ‘애국’이란 정서로 표출되는 ‘국가적 긍지’는 시민의 정치적 삶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자존감’이 개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만큼이나, 시민의 ‘국가적 자부심’은 민주공화국의 지속과 발전에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애국주의는 대체로 나쁜 것이다. 그러나 애국주의가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또는 우파들이 즐겨 이용하는 정치적 수단이라고 해서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마사 누스바움의 말이다.

문제는 애국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과 오세훈 시장의 ‘광화문 태극기 게양대’를 용인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그의 광화문 국기 게양대 구상은 정치적으로 불순하다. ‘2025년 5월 착공, 2026년 2월 완공’이라는 서울시의 사업 추진 일정이 보여준다. 테이프 자르고, 연설하고, 세리머니 하는 시점이 얼추 대통령 선거 1년 전이란 뜻이다. 이 시점에 광화문 앞에 태극기 조형물이 세워진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국가 상징물’이기에 앞서 건립을 주도한 자의 철학과 결단을 상기시키는 ‘정치적 상징자본’이 된다. 이것이 ‘국가 상징의 사유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미학적 관점에서도 저급하다는 데 있다. 오세훈이 누군가? ‘매력 서울’을 시정 슬로건으로 내걸 만큼 남다른 미적 취향을 자랑해온 ‘댄디 정치인’의 표본 아니었던가. 물론 그가 국가 정체성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스러운 각성과 개안을 했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 신념을 이렇듯 거칠게 드러내는 건 평소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오 시장 눈엔 진정 서울 도심 한복판 초대형 국기 게양대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아름다워 보이는가.

북한 기정동 마을 인공기. 게양대 높이가 160m에 이른다. 사진공동취재단

오 시장은 광화문 국기 게양대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미국의 워싱턴 모뉴먼트,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언급했다. 그런데 서울시가 공개한 광화문 태극기 게양대의 조감도를 본 순간 휴전선 북쪽 마을의 그 초대형 국기 게양대를 떠올린 이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냥 심미적인 줄로만 알았던 댄디풍 시장님의 미적 취향이 ‘냉전 20세기’의 정치적 오브제 수준이었다니. 실망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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