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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 중년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관악구청이 진행하는 은둔형 외톨이 지원 사업 ‘별빛마실학교’에서 은둔 중년 박씨의 집을 방문해 정리수납 강의를 하고 있다. 정리수납 전문가와 담당 사례관리사들, 동료들이 모여 짐 정리를 도왔다. 관악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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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에 30대는 그냥 ‘없는 시간’이에요. 일을 가끔 하긴 했지만 금방 그만두고. 집 밖으로 안 나갔어요. 사실상 죽은 삶이었죠.”

1999년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우승 소식이 실린 신문, 2000년대를 강타했다는 ‘게임월드’ 잡지 시리즈, 그즈음 공부했던 색이 바랜 일본어 기초 전공서적. 마흔두살 박아무개씨가 10여년 은둔 생활을 이어오다 어느덧 중년을 맞은 4평 남짓한 방에는 십수년 전 물건들이 빼곡했다. 멈춰 있던 방 안의 시간을 되돌리려 나선 박씨가 고심하며 버릴 물건들을 골라 내어놓기 시작했다. 터널 같던 방에 볕이 들었다.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의 은둔형 외톨이 지원 사업인 별빛마실학교의 정리·수납 활동으로 박씨네 집이 오랜만에 요란했다. 요리하기, 동료 만들기 등과 함께 은둔 생활을 벗어날 방편으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박씨는 20대 후반 사회생활 도중 입은 상처로 방 안에 틀어박혔다. 1주일에 한번 큰 가방에 1.8리터들이 소주를 잔뜩 사 오는 것이 외출 전부였다. ‘나가야 한다’와 ‘회피하고 싶다’를 반복하며 10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은둔 청년기를 지나 ‘은둔 중년’이 됐다.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지 6개월 이상이면 고립, 그 가운데 물리적으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은 지 6개월 이상이면 은둔으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정부의 청년 기준(통상 34살)을 벗어난 이들을 ‘은둔 중년’으로 부를 수 있다. 주로 청년 문제의 하나로 은둔을 다뤄온 현실에서 40~50대 중년의 은둔은 아직 구체적인 개념 정의도, 규모에 대한 추정도 없다.

다만 그 수가 이미 상당하고 경제적 고립과 건강 악화 등 청년기보다 한층 복합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게 현장 사회복지사들과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별빛마실학교를 담당하는 관악구청 관계자는 “막상 은둔 지원 사업에 참여할 사례자를 발굴하다 보니, 청년보다 40~50대 중년 남성분들이 많았다. 일부러 고른 것이 아닌데도 참여자 13명 중 11명이 40대 이상이었다”고 했다. 한겨레가 별빛마실학교에 참여한 중년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복지사에게 은둔 중년의 이야기를 들어본 이유다.

시간, 실직, 이혼…복잡한 이유들

청년이 방 안으로 은둔하는 이유가 주로 ‘취업난’과 ‘대인기피’라면, 중년 은둔은 그 배경이 다양하다. 청년 시절의 은둔이 이어진 경우도 있고, 사회생활 도중 중독, 실직, 이혼, 사업 실패 등이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윤철경 ‘한국 은둔고립자 지원기관 협의회’ 이사장은 “국내에서 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라며 “그즈음부터 은둔을 시작한 이들은 이제 30대 후반, 40대 초반 언저리에 있다”고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히키코모리’ 현상이 본격화된 일본의 경우 이미 2010년대부터 40대가 은둔형 외톨이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걸로 추정한다.

실직과 이혼 등 사회생활 도중 겪는 좌절 또한 중년 은둔의 주된 이유다. 별빛마실학교에 참여하는 50대 남성 서아무개씨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몸이 아파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월세를 낼 형편이 되지 않자 한 사람 몸을 가까스로 뉠 수 있는 좁은 무허가 건물에서 10여년간 은둔했다. 50대 유아무개씨는 아내와 이혼한 뒤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겹쳤다. 삶을 비관해 4~5년 동안 집 밖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광주시 은둔형 외톨이 지원센터가 2023년 내놓은 ‘제2차 광주광역시 은둔형 외톨이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 232명 중 만 40살 이상인 경우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실직’이 29.2%로, 청년층이 취업 실패(35.5%)를 주로 꼽은 것과 그 양상이 달랐다.

중독, 고립, 가난…벗어나고 싶지만

청년도 노인도 아닌 ‘중년’이라는 애매한 나이는 은둔의 영향을 한층 복잡하고 심각하게 만든다. 가족의 지원을 받기 쉽지 않은데다 스스로 복지 수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어 극한의 경제적 궁핍조차 그냥 견디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세상에 홀로 남았다고 느꼈다는 유씨는 “열흘 가까이 굶어본 적도 있다”고 했다.

궁핍은 중독 등 건강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박씨는 “눈을 뜨고부터 감을 때까지 하루종일 돈 걱정만 하다가 자괴감이 들어 다시 술을 먹는 삶의 반복이었다”고 했다. 박씨는 알코올 중독으로 생긴 간질환, 통풍 등을 겪고 있다. 최근 건강을 회복하고자 치료를 시작했는데, 한 손바닥을 가득 채울 만큼의 약을 매일 먹는다. 별빛마실학교에서 은둔 가구를 지원하는 서순자 사회복지사는 “고립감이 술로, 술이 또 질병으로, 우울이나 저장강박 등 정신적 문제로 이어지는 모습이 많다”며 “40~50대 남성의 고독사도 상당 부분 이런 맥락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 실태조사를 보면 2021년 기준 전체 고독사의 45.2%가 40~50대였다.


별빛마실학교 참여자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숨어 있던 존재가 우연한 계기로 지방자치단체에 포착됐고, 마침 살고 있던 관악구가 연령을 제한하지 않는 은둔 지원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사각지대에 놓이기 쉬운 사회복지망에서 은둔하는 중년은 발견 자체가 쉽지 않다. 서씨는 코로나 시기 구청이 등록 가구별 전수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굴됐다. 박씨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은둔 10년 만에 우연히 알게 돼 이를 신청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면이 닿았다.

박씨, 서씨, 유씨는 운 좋게 방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딜 준비를 시작했지만 사회 복귀까지 놓인 길은 여전히 불안하다. 지자체 단위에서 하는 별빛마실학교 프로그램은 9개월 단위이고, 이후 재고립을 막기 위한 심리상담이나 일자리 훈련, 커뮤니티 형성 등을 꾸준히 이어가기에 은둔 중년 특성에 맞춘 정부 차원의 사회 복귀 지원은 역부족이다. 은둔·고립 정책은 지난해 말 보건복지부가 처음 종합대책인 ‘고립·은둔 청년 지원 방안’을 발표하는 등 청년층을 중심으로만 막 발걸음을 뗀 정도다. 박씨는 “별빛마실학교를 통해 그나마 세상 볕을 보게 되면서 나 같은 은둔 중년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며 “우리 같은 사람들도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다시 고립되지 않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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