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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대전 카이스트에서 1호 여성 교수, 1호 여성 정교수 등 평생 '1호'의 삶을 개척해온 전산학부 문수복 교수를 만나 4시간 가까이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김성태 프리랜서
문수복(59). 일반인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전산(컴퓨터공학) 분야에선 설명이 필요 없는 글로벌한 명성의 정보기술(IT) 전문가다. 일찌감치 소셜 네트워크(SNS)의 폭발적 성장을 예견한 그의 논문들은 지금까지 총 2만 4000회 이상 인용될 정도로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 2014년 세계 각국에서 1000명 넘게 온 WWW(월드와이드웹) 콘퍼런스를 서울에 유치하는 등 주요 국제 학회에서의 존재감도 상당하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2019)·장관표창(2024), 유수의 국제상도 여럿 받았다.

한국 첫 MPI 단장 차미영 키워
차별·특권 공존한 여성 1호의 삶
특권 안주 대신 사회 기여 고민
의대 광풍? 더 시급한 과제는…
남녀 차별이 만연한 1960년대 태어나 남성이 주도해온 공학 분야에서 거둔 성과다 보니, 그를 만나면 여자라 겪어야 했던 고충과 이를 극복한 여정에 대해 대화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여성이라 누렸던 특권에 관해 이야기했다. 동시에 카이스트 1호 여성 교수, 1호 여성 정교수 등 '여성 1호'로 늘 주목받았던 자신과 달리, 여전히 한 줌의 '소수자(마이너리티)'로서 불공정을 겪는 후배 여성 공학도들을 돕고 싶어했다. 또 성별을 떠나 후배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난 2016년 서울 연세대에서 주최한 세미나에 아시아 각국 교수들과 함께 패널로 참석한 문수복 교수(가운데). [사진 문수복]
사실 이번에 문 교수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 역시 그가 키워낸 '1호 제자'와의 관계가 궁금해서였다.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기초과학연구소인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MPI) 단장에 선임돼 최근 홍진기 창조인상을 받은 모은 차미영(45) 카이스트 교수 얘기다. 토종 국내 박사이자 여성이 이런 막중한 자리에 오른 데는 그의 박사 지도교수인 문 교수 공이 작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달 말 대전 카이스트 문 교수 연구실에서 4시간 가까이 들은 인생 이야기를 그의 시각으로 재구성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여자라서 누린 특권 국비 장학생으로 떠났던 박사 과정(앰허스트)과 연구소 생활(스프린트 ATL)하느라 10년 넘게 미국에서 혼자 살다 보니 집이 그리웠다. 한국 행 결심 후 선택한 곳은 부모님이 사는 서울(서울대)이 아니라 아무 연고 없는 대전(카이스트)이었다. 돌이켜보면,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당한 거였다.
제대로 된 연구자가 되려면 성실함은 기본이고 체력도 필수다. 카이스트 교수 부임 전 박사 유학 시절 미국에서 마라톤 등 달리기와 축구를 즐겨 했다. [사진 문수복]
사실 먼저 제안이 온 건 서울대였다. 문제는 저널(학술지 논문)이었다. 전산 분야는 학술대회 논문이 더 권위가 있어 저널은 잘 안 쓰는데, 서울대는 이런 학과 특성 고려 없이 "2~3페이지라도 써서 점수만 채우라"고 했다. 카이스트는 달랐다. 저널을 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장을 돕겠다"고 했다. 결국 서울대는 지원조차 못 했고, 카이스트에 갔다.
(※카이스트는 2003년 인사규정에 '여성교원 활용을 적극 장려한다'고 못 박고, 초빙 공고에 '여성 우대'를 넣었다. 문 교수가 2003년 가을 학기에 부임하면서 여성 우대 정책 첫 수혜자가 됐다. )

솔직히 겁이 났다. 내가 입학한 1984년 서울대 전자계산기학과(현 컴공과) 신입생 53명 중 여자가 6명에 불과할 정도로 소수긴 했어도, 아예 한 명도 없는 환경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석사 때조차 서울대 컴공과 여성 1호인 전화숙 서울대 교수 등이 연구실 선배로 있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한테 고민을 털어놨더니 "카이스트처럼 개방적이고 여성 친화적인 곳에서 못 버티면 대한민국에선 버틸 데가 없다"고 했다. 다행히 한 학기 뒤에 여성 2호 교수(최성희)가 부임했다. 또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명예교수와, 한국 사회 특유의 남성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학연·지연 문화를 깨려고 노력했던 MIT 출신 서남표 총장(88·2006~13 재직) 취임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2010년 무렵 세계적으로 소위 '대박'을 친, 피인용이 많은 논문 두 개를 잇달아 내면서 '여성'이라는 꼬리표 없이 연구자로서 전성기를 맞은 데는 카이스트가 여성에 대한 편견 없이 교육계의 전위 부대 역할을 충실히 해온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지난 20여년 1세대 여성 교수로 지내면서 차별보다 혜택을 더 누렸다. 기회가 끊이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위치였다. 카이스트 교수라는 타이틀 덕도 있었지만, '여성 1호'이기에 더 주목받았다. 그리고 이런 주목은 더 큰 기회와 더 좋은 연구로 이어졌다.
여자라서 받은 차별 백범 김구 선생 따라 임시정부 활동하며 늘 거처를 옮겨 다닌 할아버지(독립운동가 문일민)를 대신해 1930년대 상하이에서 다섯 남매 건사하며 생계를 꾸린 할머니는 합리적인 분이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문수복 교수의 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문일민(오른쪽) 선생이 백범 김구 선생과 찍은 사진. [사진 문수복]
그런 영향인지 60년대 미국에서 유학한 아버지(고 문국진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 낀 둘째라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였지만 여자라서 차별받진 않았다. 컴퓨터공학을 택한 것도 아버지 영향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타임'지 표지(1982)에 등장하는 등 주목받자 "신생 분야인 컴퓨터에 기회가 많다"며 권유했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내게 서울공대는 생애 처음 여자의 한계를 경험한 낯선 세계였다. 당시 삶의 키워드가 '생존'일 정도였다. 그 시절 남고생은 무조건 기술 공업, 여고생은 가정 가사를 배웠다. 여학생이 살림살이를 배우는 동안 어떤 남학생은 컴퓨터 플로 차트까지 배우고 대학에 들어왔다. 공대생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에서 고교를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입학 전부터 남녀 격차를 벌리는 차별적 요소로 작용한 셈이다.

살아남으려고 학부 1학년 때 동네 컴퓨터 학원에 등록해 PC 베이직 프로그램을 한줄 한줄 짜봤다. 대학 커리큘럼 상 2학년부터 PC 아닌 대형 컴퓨터, 베이직 말고 파스칼을 배웠지만 동기 남자들한테 뒤처진다는 불안감에 마음이 급했다.

사실 수학을 잘했던 내겐 학업 능력보다 네트워크의 부재가 더 힘들었다. 1984년 입학 당시 그때까지 서울공대에 들어온 여자는 전부 합해도 100명이 채 안 됐다. 학연·지연으로 엮인 남자들의 일상 대화에 끼지 못해 힘들었다. 무리에 적응하려는 욕심에 공대 햄(아마추어 무선통신) 동아리 활동을 했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찌 보면 밀려나지 않고 버틴 것만도 그 시절 여자로선 대단한 성취다. 나를 포함한 1세대 여성들이 그렇게 자리를 지킨 덕분에 지금 카이스트 공대 여교수 비율이 10%(조교수는 20%)까지 올라갔다. 특히 전산학부는 여성교수 비율(51명 중 8명)이 서울대 컴공과(35명 중 2명) 보다 훨씬 높다.

정년이 6년 앞으로 다가오니, '나 혼자 특권 누린 거로 끝나면 안 된다'는 조바심이 든다. 나는 네트워크 측면에서 고충을 겪었지만 제자들은 그런 한계를 넘게 해주고 싶었다. 차미영 교수처럼.
남녀 떠나 사람이 없다 지난해 차 박사가 막스플랑크연구소(MPI) 단장이 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여자 토종 박사인 그의 발탁 배경을 다들 궁금해한다. 당연히 실력이 바탕이 됐지만, 네트워크의 힘도 빼놓을 수 없다.

차 교수가 박사 과정을 시작한 2004년 3월 홍콩에서 열린 큰 국제학회(IEEE INFOCOM)에 데려갔다. 내가 그랬듯, 교수였던 아버지의 안식년에 미국에 따라간 덕분에 영어가 편했던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행사에 다 참석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수 문(문 교수 영어 이름)의 1호 제자"라며 자신이 얼마나 호기심 많은 연구자인지 홍보했다.
지난 2007년 말 문수복 교수가 그의 1호 제자이자 지금은 막스플랑크연구소 단장에 선임된 차미영 교수(오른쪽)의 박사 논문 심사 후 샴페인을 따서 축하하는 모습. [사진 문수복]
이때 그를 눈여겨본 럿거스대 책임 교수이자 AT&T 연구원이 AT&T 연구소 인턴십을 제안했다. 당시 한국에선 전무하다시피 한 해외 주요 연구소 경험 기회를 스스로 만든 거다. 이게 차 교수를 일찌감치 다른 학생과 차별화했고, 어쩌면 인생까지 바꿨는지도 모른다.

차 교수가 박사를 마칠 즈음인 2007년 8월 교토에서 열린 학회에서도 이런 적극적인 소통능력이 빛을 발했다. 돈 많다고 소문난 MPI에 차 교수를 포닥(박사후과정)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유럽 등 외국 연구소에선 경력이 뛰어나도 서류만 보고 뽑지 않는다. 교토 학회에 데려가 직접 만나게 했다. MPI 측은 연구 열정으로 가득 찬 차 교수를 마음에 들어 해 포닥으로 채용했고, 차 교수는 카이스트 교수 부임 이후에도 MPI와 꾸준히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런 오랜 신뢰 관계가 그를 한국인 첫 MPI 단장으로 이끌었다.

요즘 똑똑한 인재들이 공대나 기초학문을 외면하고 의대만 찾는 이른바 의대 쏠림에 대한 우려가 크다. 하지만 난 카이스트가 상위 0.1%로 채워지느냐, 혹은 1%로 채워지느냐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의대 아닌 자기만의 길을 선택하는 천재는 항상 있다. 대학은 영재만 기다릴 게 아니라 범재가 와도 성별 등 배경과 무관하게 기초를 갖추게 돕고, 이들이 천재와 어우러져 계속 호기심 갖고 연구하도록 충분한 동기 부여를 해줘야 한다. 결국 자발성이 관건이니까.

지금은 국가 차원의 공학 인재 유출(브레인 드레인)이 심각하다. 어떻게 이를 유지·유입(브레인 리텐션)으로 바꿀지 고민이 깊다. 아울러, 출산율 저하로 키워낼 인재 자체가 없어질까 두렵다. 공대에 입학했던 40년 전처럼 생존애 다시 내 화두가 된 이유다. 주체가 '나'에서 '사회'로 바뀌긴 했지만.
안혜리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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