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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편집인
이번 연금개혁 논의를 보면서 프레임의 무서움을 새삼 느꼈다. 프레임은 검은색을 흰색으로도 바꾸는 고약한 힘을 지녔다. 지난달 말 “소득대체율 44%에 합의하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한마디가 연금개혁의 판세를 뒤집었다. 통 크게 양보한 듯한 모양새가 됐다. 민주당은 연금개혁에 찬성하고, 정부와 국민의힘은 반대한다는 프레임이 짜였다. 앞으로 연금에 문제가 생기면 21대 국회 막판에 머뭇거린 정부·여당이 책임을 뒤집어쓰게 생겼다. 정부·여당은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소득대체율 40→44%인상은 개악
한번 올리면 다시 내리기 어려워져
더 받겠다고 역주행하는 국가 없어
일본 33%, 우리도 동결·인하해야

그동안 이 대표는 연금개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대선 때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지난 2년간 민주당이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법안에 연금개혁이 포함된 적도 없었다. 이 한방으로 단숨에 연금개혁의 칼자루를 쥐었다. 정략적 셈법에 관한 한 확실히 고단수다. 이 대표가 받아들이겠다는 안은 보험료율 9→13%, 소득대체율 40→44%로 올리는 것이다. 보험료율은 내는 돈(기준소득 대비), 소득대체율은 받는 돈(가입기간 평균소득 대비)이다. 기다렸다는 듯 당시 김진표 국회의장이 “원 포인트 본회의라도 열어 처리하자”고 거들었다. 연금 전문가는 물론 상당수 여당 정치인, 언론이 가세했다. 반대하면 역적으로 몰리는 분위기였다. 어느새 이 안이 연금개혁의 정답으로 자리 잡았다. 22대 국회에서도 그대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주장은 ‘26년째 9%인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 일부에선 ‘역사적 합의’라고 치켜세웠다. 얼핏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문제가 있다. 보험료율 인상만 강조했지, 소득대체율을 44%로 올리는 게 개악이라는 점은 쏙 뺐다.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보험료율 인상 효과를 상당 부분 상쇄한다. 더 내고, 더 받는 건 하나 마나 한 개혁이다. 일종의 속임수다. 미래 세대가 어떻게 되든 기성세대는 큰 손해를 안 보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소득대체율을 올리기 시작하면 훗날 내리는 건 힘들다. 나쁜 선례가 된다.

연금개혁의 목표는 기금 고갈을 막는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기금은 2055년 바닥난다. 1990년생 이후는 연금을 붓기만 하다가 끝날 수 있다.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4%로 조정하면 고갈 시기를 2064년으로 9년 늦춘다. 9년으로는 부족하다. 한번 고칠 때 제대로 고쳐야지, 언제 또 손볼지 기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에 따르면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않으려면 보험료율을 19.8%까지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로 동결해야 한다.

저출생·고령화로 연금 고갈은 전 세계의 고민거리다. 각국은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을 하고 있다. 보험료율은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내린다. 가입기간을 늘리고, 수급 연령을 늦추고 있다. 소득대체율을 올리며 역주행하는 국가는 없다. 소득대체율 인상을 개혁이라고 떠드는 나라는 더더욱 없다. 우리도 40년에 걸쳐 소득대체율을 70%에서 40%(2028년 기준)까지 낮춰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토론 때 소득대체율 인하에 대해 “용돈 연금을 만들 거냐”고 반대했다. 집권 후 소득대체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소신을 바꿨다. 노 전 대통령이 뛰어난 점이다. 반발을 무릅쓰고 40%로 내리는 안을 관철시켰다. 44%로 다시 올리면 전 세계로부터 ‘한국은 요술 방망이라도 숨겨 놓았느냐’는 조롱을 들을 것이다.

결국 잘못된 안을 갖고, 야당은 빨리 처리하자고 기세등등하게 다그친 셈이다. 정부·여당은 넋 놓고 있다가 주도권을 빼앗긴 채 우왕좌왕했다. 기껏 내놓은 반박 카드가 모수개혁(보험료율·소득대체율 조정)과 구조개혁(국민·공무원·기초연금 조정)을 같이하자는 것이다. 집권 2년 내내 손 놓고 있다가 갑자기 구조개혁을 들고나온 건 궁색하다. 구조개혁은 정권 후반기에 어렵다. 현실성이 없는 것을 갖다 붙이면 연금개혁을 하기 싫어서 그런다는 오해만 산다.

정부·여당이 끌려다니는 건 목표나 입장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해보겠다는 의지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구조개혁으로 물을 탈 게 아니라 소득대체율 인상은 안 된다고 맞서야 한다.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되 소득대체율은 40%로 동결하자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해놓고, 다음에 보험료율을 13%보다 더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보다 낮춰야 한다. 갈 길이 멀다. 일본은 보험료율 18.3%, 소득대체율 33%다. 우리보다 두 배를 내고, 덜 받는다. 덕분에 100년 동안 지급할 돈을 쌓아두고 있다.

더 내고 덜 받는 데 속 좋을 사람은 없다. 다들 표 계산을 하면서 개혁하는 시늉만 내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 말처럼 “인기 없는 정책”이다. 정부·여당이 보험료율을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내리는 로드맵을 제시하는 게 우선이다. 이 걸 이 대표가 받아들인다면 연금개혁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해 줄 만하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지도자라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젊은이에게 빚을 떠넘겨선 안 된다. 여기에 보수·진보가 따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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