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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후 1시 37분 승강기 운행이 중단된 인천시 중구 한 아파트단지. 한 노인이 검은색 비닐봉투를 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다. 박종서 기자
17일 오후 12시 30분쯤 인천 중구의 한 아파트 1층에 들어선 김모(69)씨는 엘리베이터 문에 붙은 ‘운행 금지’ 안내문을 지나 계단 앞에 섰다. 폭염에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쓰고 있던 하얀색 마스크를 벗은 김씨는 몇 초간 멍하니 있더니 심호흡을 했다. 마침 재활용품을 한가득 들고 내려오던 백발의 이웃이 “12층까지 가시려면 힘들겄어”라고 인사를 건넸다. 9층에 산다는 그는 이틀 만에 집에서 나왔다고 했다.

김씨는 한 손엔 병원에서 받아온 약봉지를 들고 한 손으론 빨간 난간을 의지하며 힘겹게 걸음을 뗐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장염을 앓아 며칠째 제대로 먹은 게 없던 그의 얼굴은 층이 높아질수록 더 하얗게 질렸다. 김씨의 집은 12층. 3층과 8층, 11층에서 쉰 뒤 8분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김씨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눈앞이 까마득하고 머리가 핑 돈다”고 말했다.

지난 5일부터 15층짜리 608세대의 아파트 내 엘리베이터 24대가 모두 안전검사에 불합격해 운행을 중단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준공 35년 차인 이곳엔 대부분 고령층이 거주한다. 연일 25도를 넘는 무더운 날씨에 엘리베이터까지 멈추자 주민들은 최대한 두문불출하고 있다. 10층에 사는 70대 남성 A씨는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어야 나간다”며 “당뇨를 앓고 있어 오늘은 반드시 병원에 가야 해 외출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입주민 여성 B씨(69)도 “당분간은 다니던 헬스장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12층까지 오르는 내내 김씨(69)는 왼손으로 빨간 계단 난간에 몸을 지탱했다. 약 7분만에 12층에 도착한 김씨의 얼굴에는 땀이 쏟아졌다. 박종서 기자
발이 묶인 고령층 입주민은 택배나 배달로 생필품 등을 주문하는 것도 포기했다. 집 앞 대신 1층 공동현관에 배달된 물품을 직접 들고 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에 만난 택배기사 이모씨는 “엘리베이터가 운행될 땐 120개가 넘던 택배 수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건 정밀안전검사 불합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은 지난 2021년 이 아파트 정밀안전검사 당시 손가락끼임 방지장치 등 8대의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조건으로 사용을 허가했다. 하지만 아파트 입주자대표회가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고, 지난 5일 최종 운행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최근 입주자대표회가 뒤늦게 엘리베이터 업체와 공사 계약을 맺었지만, 부품 수급이 늦어지면서 공사도 밀린 상태다.

노령층 주민들은 응급 상황 발생 시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소방 구급대원이 계단으로 환자를 이송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방 당국에 따르면 지난 7일 4층에 사는 80대 남성이 의식장애 증세로, 지난 12일엔 13층 주민인 80대 여성이 호흡곤란 증상을 호소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12일엔 화재진압용 펌프차와 구급차가 결합한 ‘펌뷸런스’까지 동원됐다.
지난 17일 인천시 중구 한 아파트단지, 엘리베이터 문 앞에는 ‘승강기 운행금지’라는 글씨가 적힌 노란색 안내문이 붙어있다. 박종서 기자
관리사무소는 응급 환자가 생기면 임시로 엘리베이터를 가동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결정이 쉽지 않다. 승강기안전관리법상 안전검사에서 불합격한 승강기는 개선 조치 후 검사를 다시 받아 합격 판정이 나온 뒤 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어길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엘리베이터는 한여름을 지나오는 8월쯤 다시 운행될 전망이다. 자재 수급과 공사, 안전 검사 등을 거치려면 적어도 두 달 이상 걸릴 것으로 관리사무소와 구청은 보고 있다. 중구 관계자는 “구청장이 이날 오후 6시에 간담회를 열고 주민 의견을 청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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