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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생이 ‘햄릿은 바보다’라고 썼다고 치자. 그런 이야기가 독특하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사고해 그 글을 썼다는 게 독창적인 것이다.” 그에게 챗지피티를 이용해 글을 쓰는 건 ‘체육관에 지게차를 들여와 바벨을 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자연스레 한국의 교육 현실이 떠올랐다.
1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3회 한겨레 사람과디지털포럼에 기조연설자로 참여한 세계적인 에스에프 작가 테드 창이 포럼이 끝난 뒤 책 사인회를 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김영희 | 편집인

4년 전 영국에서 있었던 일은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할 때 종종 인용되는 사례다. 코로나 당시 대입을 위한 ‘A 레벨’ 시험을 시행할 수 없었던 영국 정부는 알고리즘에 기반한 성적 산출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동안 교사들이 평가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예상 점수가 나이, 성별, 인종에 따라 편향성을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다. 알고리즘은 이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웬걸, 학생의 40% 가까이가 교사들 예상 점수보다 낮은 점수를 받으며 수만명이 연초에 조건부로 합격했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상황이 됐다. 알고리즘이 지역 우편번호 등에 따라 노동자·소외 계층 학생에게는 지나치게 낮게, 사립학교 학생에게는 지나치게 높게 점수를 준 것으로 분석됐다. 수백명의 시위대는 성적표를 불 지르며 외쳤다. “알고리즘은 꺼져라!”

꺼지기는커녕, 대화형 인공지능(AI) 서비스인 챗지피티의 대중적 성공 이후 알고리즘은 지난 1~2년 우리 삶 속에 더 깊이 들어왔다. 국가든 개인이든 이 흐름에서 뒤처지면 도태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떤 이에게는 기회지만 어떤 이에게는 불안과 현기증이다.

지난 12일 ‘사람 넘보는 에이아이, 인간 가치도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열린 제3회 한겨레 사람과디지털포럼 덕분에 세계 최고의 에스에프(SF) 작가로 불리는 테드 창을 비롯해 최예진 미 워싱턴대 교수, 아베바 비르하네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 교수, 게리 마커스 미 뉴욕대 교수 등 요즘 인공지능 분야에서 가장 ‘핫’하다는 이들의 견해를 한자리에서 듣는 드문 기회를 가졌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위한 ‘도구’로 쓰여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작가, 컴퓨터공학자, 인지심리학자 등 각각 다른 전공 분야만큼 그 도구를 바라보는 관점이 미묘하게 결이 다른 것도 흥미로웠다.

특히 낙관론과 비관론이 맞서는 대립 구도를 넘어,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테드 창의 이야기는 인상 깊었다. “세계에 이미 너무도 많은 인간이 존재하는데 ‘인간 같은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인가.” “인공지능은 10초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 인간이 1년 내내 10초마다 심오한 감동을 계속 느낄 수 있을까?”

그는 학생들이 글쓰기 숙제에 챗지피티 등에 의존하는 현상을 ‘체육관에 지게차를 들여와 바벨을 드는 것’에 비유하며 우려했다. “어떤 학생이 ‘햄릿은 바보다’라고 썼다고 치자. 그런 이야기가 독특하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사고해 그 글을 썼다는 게 독창적인 것이다.” 어떤 스포츠 종목 선수가 될지 몰라도 바벨을 직접 드는 근력운동을 꾸준히 하는 게 도움 되는 것처럼 글쓰기는 “두뇌를 위한 근력운동”이라는 것이다.

자연스레 한국의 교육 현실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훌륭한 교육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명시된 추구하는 인간상엔 “자기주도적 사람, 창의적 사람, 문화적 소양과 다원적 가치에 대한 이해, 공동체 의식과 민주시민” 같은 표현들이 나온다. 인공지능 시대 전문가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가치 대부분이 망라된 셈이다.

문제는 추구하는 인간상과 거의 정반대로 납작한 현실이다. ‘디지털 100만 인재 양성’을 내건 윤석열 정부에서 가장 속도를 내는 것은 에듀테크 기업들이 참여하는 디지털 인공지능 교과서 도입 정도다. 8월부터 검정 작업을 거쳐 내년부터 초중등에 도입되는데,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는 거치지 않았다. 태블릿이야 나눠 준다 해도 집안 환경에 따른 피드백 차이 등 디지털 격차는 어떻게 할지, 학생들의 학습 데이터를 클라우드에 보관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지, 지식 전달을 인공지능에 넘겨준 교사의 역할은 무엇인지, 논쟁적 이슈가 한둘이 아니다. 디지털 교육 확대 정책을 펼쳐오던 스웨덴은 지난해 학생들의 문해력·사고력이 오히려 지속적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나자 종이책과 필기도구를 활용한 전통 교육 방식을 재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일상적으로 정보와 오락이 혼재된 디지털 기기에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이 스크롤 바를 내리며 깊은 지식과 사고 훈련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적잖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의 교육 접목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개별 맞춤형 교육을 구현해낼 것이라는 건 환상이다. 칠판만 있던 교실에 프로젝션 티브이나 컴퓨터 도입은 획기적 변화였지만, 교육 문제 해결로 이어진 건 아니지 않나. ‘반도체 설계의 전설’로 불리는 짐 켈러 텐스토렌트의 최고경영자는 최근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교에선 프로그래밍을, 대학에선 캐드(CAD)를 가르치는 건 미친 짓”이라며 읽고, 쓰고, 생각하고, 예술을 하고, 기초과학과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가장 서두를 일이 고작 디지털 인공지능 교과서인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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