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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6일)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정한 ‘국제 가사노동자의 날’이었습니다. 국내에선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가사근로자법)이 시행된 지 딱 2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기간 우리 사회에서 ‘가사근로자’는 법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도우미 아줌마, 이모님, 가정부, 파출부, 식모 등 그 어떤 직업보다 다양한 이름을 가졌지만, 철저하게 법 바깥에서만 불렸습니다.


긴 투쟁 끝에 2021년 5월 ‘가사근로자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가사근로자는 비로소 노동관계법을 적용받는 ‘공식 영역’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동안 직업소개소 등을 통해 ‘프리랜서’ 형태로 근무하던 가사 근로자들이 정부 인증을 받은 ‘가사서비스 제공기관’들과 정식 ‘근로계약’을 맺고, 4대 보험과 연차, 유급휴일 등을 적용받게 된 겁니다.

하지만 법 시행 2년이 지난 지금, 현장의 모습은 어떨까요. 정부 인증을 받은 업체는 전체의 1% 수준에 머물고 있고, 적자에 시달리다 휴업·폐업을 택한 업체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 “완전히 적자예요”…가격 경쟁 밀리는 ‘정부 인증’ 업체들

지난달 9일, 가사서비스 정부 인증기업 50여 곳이 서울역 인근에 모여 협회 창립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경영상 어려움을 호소하며, 정부와 국회에 추가적인 지원을 촉구했습니다.

‘가사근로자들의 처우 개선’이라는 법 취지에 공감해 인증을 받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일반 유료 직업소개소나 알선 플랫폼 등과 경쟁하기엔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업계 특성상 이직률이 높고 근무 일정이 불규칙한 탓에, 법에서 정한 대로 5명 이상 ‘상시 고용 상태’를 유지하며 연차와 휴일을 챙기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영세 업체들의 비용 부담은 그만큼 커졌습니다.

60대 이상 고령 근로자가 많은 만큼 국민연금, 고용보험 가입의 효과가 작아, ‘얼마 벌지도 못하는데 세금 떼면 남는 게 없다’고 불편을 호소하는 근로자들이 많았습니다.

고객 입장에서 더 비싼 값을 주고 정부 인증기관을 선택했을 때의 메리트가 적은 점도 문제였습니다. 가사근로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더라도 서비스 품질과 만족도는 ‘복불복’이라고 생각하는 이용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김지현 / 청주 A 가사서비스 제공기관 대표

“4대 보험 딱 들어가는 순간, 가격 경쟁력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증 기업의 자격 조건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직원 5명은 유지하려고 정말 애를 씁니다. 완전히 적자예요. 고객은 다들 (인증기관 서비스 이용을) 원해요. 그런데 문제는 4대 보험과 퇴직금과 운영 경비, 이거 어디서 나올 것이냐죠. 고객은 더 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근데 회사도 그럴 여유가 없어요. 그런다고 가사근로자의 급여를 깎습니까? 활로가 없습니다. 정말 앞날이 막막합니다.”

김기순 / 안산 B 가사서비스 제공기관 대표

“시장을 활성화 시키려면 가격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기업들에 규제를 풀어주면서, 맞벌이 부부는 누구나 쉽게 가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정책적인 대안이 먼저 만들어지고 홍보도 더 많이 이뤄져야 합니다.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지방자치단체 사업 예산은 너무 작아요. 고용노동부에서 인증을 내줘서 이런 서비스를 하니까 장기적으로 괜찮겠다 싶어서 참여했는데 많이 힘든 거예요. 직원들 4대 보험 내기도 바쁘고, 월급도 주기도 바쁘고, 정말 힘든 거예요. 시장 확대가 지금보다 더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정부 인증 업체, 전체의 1% 수준…‘직업소개소’는 증가세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생각보다 정부 인증에 동참한 기업들이 적은 탓이기도 합니다. 현재 정부 인증을 받은 가사서비스 제공기관은 106곳, 소속 근로자는 1,500명 내외입니다.

통계청 지역별고용조사에 따르면, 2023년 하반기 기준 국내 ‘가사 및 육아도우미’는 10만 5,000명입니다. 결국 인증 업체 소속 근로자가 전체의 1.4% 수준에 불과하단 얘깁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을 비롯한 노동계에선 같은 통계에 잡힌 돌봄서비스 근로자 등을 포함할 경우 국내 가사근로자가 모두 29만 명 수준일 거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 수치를 적용한다면, 현재 인증 업체 소속 근로자는 전체의 0.5% 수준이 됩니다.


이마저도 지역별 편중이 심했습니다. 전체 인증 업체의 절반 가량은 서울에 쏠려있었고, 전남·충남·대구경북 등 3곳에는 인증 업체가 1곳도 없었습니다.

반면, 인증 업체의 경쟁 상대인 직업소개소는 최근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기준으론 무료 1,735곳, 유료 1만 5,020곳 등 모두 1만 6,755곳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인증 업체 대표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유료 직업소개소를 없애지 않는 한, 현행법으론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 올해 들어서만 휴·폐업 5곳…“인증 반납 고민 기업 많아”

이 같은 상황은 실제 ‘휴업·폐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올해 들어서만 업체 2곳이 휴업을, 3곳이 폐업을 택했습니다. 법 시행 이후 2년을 통틀어 보면, 모두 12곳이 휴·폐업을 택했습니다.

취재진이 만난 서울의 한 가사서비스 업체는 지난해 6월 정부 인증을 받았지만 1년 만에 ‘인증 반납’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존에 운영하던 유료 직업소개소 형태로 돌아가겠다는 얘깁니다.

이 업체 대표는 “4대 보험도 되고, 가사근로자도 제도권 안에 들어오는 건 참 좋은 일이지만,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수입이 안 된다”며 “진퇴양난이다. 취지는 좋지만, 현실에 너무 맞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 ‘가사근로자법’ 정착하려면…“인증 업체 지원 강화 필요”

가사근로자법 시행 2년을 맞아 지난 13일 한국가사노동자협회와 한국노총 가사·돌봄유니온 등 주최로 열린 국회 토론회에선 법 정착을 위한 다양한 제언들이 나왔습니다.

전문가들은 우선, 인증 업체들의 ‘일감 확대’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았습니다. 직업소개소, 알선 플랫폼보다 더 많은 일거리를 얻을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등의 ‘공적 일감’ 확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지자체 주도의 가사서비스 지원 사업에서 수행기관을 선정할 때 정부 인증 가사서비스 제공기관에 가점을 주고, 더 많은 공적 돌봄 ‘바우처 사업’에 인증 업체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가사근로자 대부분이 60대 이상이란 점을 감안해 국민연금이나 고용보험 대신 교통비 지원 등 별도의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제시됐습니다.

‘당근마켓’과 같은 지역 기반 플랫폼부터 부동산, 편의점, 마트, 아파트, 주민센터까지 다양한 창구를 활용해 가사서비스 제공기관을 홍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비공식 영역의 가사서비스 종사자들이 안정적으로 일함으로써 양질의 일자리를 누릴 수 있기 위해선 인증기관과 근로계약을 맺고 일하는 비율이 높아져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인증기관이 알선방식 제공기관보다 더 많은 일감을 확보하고 배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조영수 가사서비스종합지원센터 상담팀장은 “현재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정부에서 한부모, 임신부, 맞벌이 가정, 저소득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다양한 가사서비스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며 “사회서비스에 가사서비스를 포함해 전국에 확대되도록 노력하고, 참여기관을 인증기관으로 한정하거나 가점 부여로 고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복남 사회적협동조합 강서나눔돌봄센터 이사장은 “당장 인증기관들이 4대 보험과 퇴직금 등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종합지원센터 사업 안에서 사업비 지원이나 우수 기업 선정을 통한 인센티브 지원 등도 고려해 볼 만한 방법”이라고 전했습니다.


■ 정부 “지자체 사업 활용한 수요 확대…기업 복지몰 입점 추진”

인증 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고용노동부는 개선안 마련을 약속했습니다.

우선,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등 유관 부처와의 협업을 강화하고 지방자치단체 사업을 활용해 인증 업체 수요를 확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도 현대이지웰, SK베네피아 등 기업 복지카드 사용처에 인증 업체들을 입점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또, 서비스 품질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가사근로자들을 상대로 ‘내일배움카드’를 활용한 100% 국가 부담 직업훈련을 제공하고, 지원센터 2곳을 운영하며 무료 직무 교육을 제공하겠다고도 밝혔습니다.

69년간의 투쟁을 거쳐 만들어졌지만, 시행 2년 만에 기로에 서게 된 ‘가사근로자법’. 가사근로자들의 개선된 근무 환경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담보하려면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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