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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성



어쩌다 보니 흔히 ‘럭셔리’라고 부르는 세계를 직간접적으로 폭넓게 경험할 수 있는 직업인으로 15년 이상 살고 있다. 몇 억원을 우습게 넘기는 차를 시승하거나 레바논 귀족과 저택에서 샴페인을 마시는 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캐시미어 브랜드 대표가 지난여름 휴가에 스페인 왕자와 보낸 시간에 대해 인터뷰했던 순간도 생생하다. 마주 앉는 것만으로 기운과 재능이 짜릿하게 느껴지는 셀러브리티와의 대화도 호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을 몇 배나 압축한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이 들려주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겨 있는 통찰을 음미하며 기사와 칼럼으로 전하는 일에는 작지 않은 의미와 배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좀 공허하기도 했다. 묻기 시작했던 것이다. 순간의 의미와 배움들을 내 것으로 삼고 있나? 노력하면 내 것이 될 수 있나? 이건 4억원짜리 자동차를 언젠가 꼭 갖고야 말겠다는 다짐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로로피아나 같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거나, 레바논 귀족처럼 금수저가 아닌 삶을 원망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그 모든 뿌듯함들이 어쩐지 읽을 때만 제대로 사는 기분이 드는 자기계발서 같았다. 황홀하니 엿볼 수는 있지만 도무지 내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경험인데 내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히 깨달았다.

그즈음이었을까. 스쿠터를 타면 회사에서 10분 정도면 달려갈 수 있는 요가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숨 좀 쉬면서 살고 싶어서. 바쁘게 경험하고 취재해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마감하는 일상에는 보람도 성취도 있었다. 거기에 취해 달려온 시간이 이미 10년 이상이었다. 쌓여 있는 피로와 과로로 몸은 점점 둔해지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도 예전 같지 않았다. 몸이 그러니 마음도 굳어졌다. 자신을 좀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을 만나서 느끼는 쾌감 말고, 나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나만의 럭셔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커리어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다양하게 노력했다. 요가는 벌써 10년째 수련하고 있다. 최근 3년은 좀 게으른 수련자였다. 열심히 수련하던 요가 스튜디오가 사라진 후, 몸과 마음을 위탁할 수 있는 다른 요가원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전 7년의 성실함과 치열함을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서울에서 가장 존경받는 요가 스튜디오였던 곳에서 세 개의 지도자 자격증을 따기도 했으니까. 2021년에 출간한 책 <단정한 실패>는 그때의 경험으로 쓴 요가 에세이였다.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떳떳할 수만 있다면 나의 요가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다. 권투를 잠깐 배웠고, 요즘은 PT(개인 운동 강습)를 받는 중이지만 그 역시 더 나은 요가 수련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공허함’에 입문해 어느덧 10년째

유연한 사람들 위한 수련 아닌

뻣뻣한 채로 시작해 유연해지는 것


느려보여도 전신 근력 강화 도움

움직이기 시작하면 잡생각 사라져


집중의 영역에서 진행되는 성장

이토록 호사스러운 경험 또 있으랴




요가는 좋다. 너무 좋다. 누구에게나 좋다. 좋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고, 여지없이 단언할 수 있다. 꾸준히 수련하면 분명히 발전하고, 그 과정에서 참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깨달을 수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또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어렸을 땐 검도나 유도도 수련했지만 요가에는 또 다른 성취감이 있었다. 맨몸으로 혼자 하는 수련이라는 심플함. 그래서인지 몸과 마음이 가장 직관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도 마냥 좋았다. 그래서 참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남자들에게 권해왔다. 누구나 건강해지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두 가지 대답이 있었다.

요가는 좀 유연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몸이 너무 뻣뻣해서 요가는 못할 것 같아.

요가원 가면 여자분들이 훨씬 많지 않아? 나는 아무래도 부끄러워서 못할 것 같아.

아무래도 잊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였다는 사실을. 어떤 세계에 처음 진입할 땐 낯설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금은 헤매고, 숙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말이다. 그거야말로 어른의 함정 혹은 판타지가 아닐까, 친구들의 걱정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미 참 많은 것들을 알고 있고,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도전을 척척 해내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나도 모르게 여겨온 것은 아닐는지. 멋지고 능숙한 어른이 되고 싶어서 낯선 경험을 부러 피해온 것은 또 아닐는지.

요가는 유연한 사람을 위한 수련이 아니다. 누구나 뻣뻣한 채로 시작해 가까스로 유연해지는 것이다. 그 유연함이 실은 강함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소셜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멋진 사진들과 실제의 요가 수련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미지에는 과정이 담기지 않으니까. 사진은 무척 능숙한 누군가가 부단히 노력해 완성한 순간을 공들여 찍어 공개한 것이다. 다른 모든 성취가 그런 것처럼 진짜 중요한 건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당연한 미숙함을 걱정하기 전에 과정의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생각으로 경험하기를 다시 한번 권하고 싶다. 다행히 요가원은 서로의 미숙함을 묵묵히 응원하는 공간이다. 모두가 미숙하고, 다 같이 각자의 완벽을 위해 부단히 수련하는 곳. 이미 어른인 사람이 이토록 맘껏 미숙해도 괜찮은 공간이 또 있을까? 그걸 깨닫는 순간의 자유야말로 달콤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맞다. 요가원에 가면 여자 수련생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대부분은 몸의 선이 정확하게 드러나는 요가복을 입고 수련하니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는 좀 부끄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가 매트 위에서 수련할 땐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걸 딱 한 번만 수련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15분 정도 걸릴까?

나도 그랬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요가복도 없었다. 무릎 정도 길이에서 떨어지는 면 소재의 트레이닝 바지에 가벼운 면 티셔츠를 입고 매트 위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두리번거리며 부끄러워했다. 낯선 분위기와 산스크리트어로 지칭하는 자세의 이름 사이에서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 책에는 다들 능숙하게 해내는 자세와 자세 사이에서 허둥대는 나 자신을 “갑자기 떨어진 고구마 모양 운석 같았다”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자 생각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몸과 자세에 대해서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뼈와 근육의 움직임과 쓰임에 대해 섬세하게 이끌어주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따라, 한 번도 통제한 적 없는 방식으로 내 몸을 통제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또 다른 차원의 집중이었다. 어느새 요가 스튜디오 안에 다른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내가 뭘 입고 있는지도 잊었다. 그렇게 매트 위로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와 내 숨소리만 들리는 경험. 그 깊은 고요와 집중의 중독적 쾌감.

요가는 쉽지 않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지만 엄청난 근력을 쓴다. 버틸 수 있는 한 최대한 버티며 한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도전이 있어야 성취도 있는 법. 일주일에 3일 3~5시간 정도를 꾸준히 수련하던 그때의 몸과 마음이 일생에서 가장 강하고 맑았다.

세상에 이런 시간과 공간이 또 있을까. 지나고 보면 그 깨끗하고 안전한 집중의 영역 안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시간이야말로 호사스러웠다. 레바논 귀족이랑 마셨던 샴페인? 세계적인 수준의 부자가 요트를 타고 즐기는 여름 휴가? 그 즐거움을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매트 위에서 몸을 움직이며 집중하는 것만으로 접할 수 있는 이런 세계를 최대한 알리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진짜 좋으니까. 어쩌면 아무것도 필요 없는, 내 몸을 내가 통제하면서 성장하는 경험이야말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진짜 럭셔리일 테니까.

■정우성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처럼 가볍게>를 썼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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