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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마음 돌봄’ MZ가 MZ에게
거절 어려운 당신

타인에게 넘어간 자기결정권
정당한 요구 억압된 경험 되짚고
본인이 가진 힘 정확한 인식부터
게티이미지뱅크

Q. 부장님은 종종 저를 불러 추가 업무를 줍니다. 저는 군소리 없이 받아오는데, 가만히 보면 저에게만 이런 업무들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잘 거절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어려울 것 같아요.” 남들은 어렵지 않게 뱉어내는 그 말이 저는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 나보다 더 많고, 더 어려운 일 아닐까? 못 한다고 했다가 괜히 미운털 박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이렇게 하나·둘 업무가 추가되면, 어느 순간 나에게만 잡일이 쏟아진다는 생각에 억울해지고 화가 납니다.

남들만 탓할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스스로 일을 떠안는 면도 있으니까요. 저는 소위 말하는 을의 일도 대신합니다. 타사 제품에 대한 시장조사를 외부에 맡겼는데 돌아온 결과물이 엉성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제가 직접 검색해 채웠습니다. 선배가 옆에서 보더니 묻더라고요. “그걸 왜 직접 해? 다시 보완해 달라고 하면 되지.” 직접 하는 게 더 편하다는 제 말을 선배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혹시 내가 갑질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기분 상해서 다음에는 일을 더 이상하게 해오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요.

거절도, 남에게 뭘 부탁하거나 시키는 것도 너무 어려운 저는 ‘호구’일까요? 어려서부터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마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왔는데, 주위를 돌아보니 저만 바보처럼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남들이 나를 만만하게 본다는 피해의식과 내가 일을 못하는 거라는 자책 사이를 오가는데, 이제는 뭐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적당히 이기적으로 회사생활을 하고 싶지만 지금 직장에서는 이미 ‘예스맨’으로 이미지가 굳은 것 같아 이직해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정수진(가명·32)

A. 게임을 껐다가 다시 시작하듯 삶도 리셋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리셋을 꿈꾸는 모습에서 수진님이 얼마나 소진되셨는지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수진님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이미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수진님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반복되는 문제에 기여하는 나의 특성은 무엇인지 성찰해오신 흔적들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우선 사연을 보면, 다른 사람이 수진님을 어떻게 볼지 많이 신경 쓰고 계신 것 같아요. 남들은 일을 얼마큼 하는지, 나도 그만큼 하고 있는지 주변을 의식하며 비교하고, 남들이 나를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미움 살 만한 행동은 애초에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건 그 자체로 부정적인 특성이 아니에요. 오히려 다른 사람의 관점을 헤아리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사회성의 발로입니다. 추측건대, 주변 사람들은 수진님에 대해 책임감 있고 착실하며 타인의 기분을 잘 살피는, 함께 일할 만한 동료라고 여기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와 기분을 지나치게 신경 쓰다 보면 수진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기 어려워집니다. 새 업무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일을 더 맡을 만한 시간과 에너지는 있는지, 이걸 거절하면(혹은 남에게 일을 시키면) 정말로 미움을 받을지,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기필코 피해야 하는 재앙적 사건일지 생각할 여유가 사라지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차고, 삶의 결정권도 타인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수진님 입장에서는 억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자율적인 결정이었다기보다는 타인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니까요. 어쩌면 사람들은 이미 수진님에게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악의가 아니더라도 아쉬운 상황이 되면 수진님 생각이 먼저 나는 거지요.

이 문제의 해결은 본인이 가진 힘을 잘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떠밀리는 게 아니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요. 거절하는 게 어려울 수 있어요. ‘못 한다’는 말이 무능이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더더욱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울 거예요.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질 테니까요. 그렇다면 우선 스스로에게 시간을 벌어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부장님에게 즉각적으로 답하는 게 아니라 “잠시 진행 중인 업무들을 살펴보고 와서 말씀드려도 될까요?”라면서 시간을 번 후, 차분히 생각해 보는 거예요.

그 다음은 타인의 권리와 경계를 침해하는, 소위 말하는 갑질 같은 부당한 힘과 건강한 힘을 구별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수진님에겐 힘을 발휘한다는 게 전부 위험하고 해로운 것으로 느껴지는 거 같아요. 하지만 힘의 행사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예컨대, 외부업체 직원에게 부족한 업무를 보완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다른 사람의 업무가 나에게 넘어오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외부업체와의 협업에 있어 리더십을 발휘하는 건강한 힘의 행사로 여겨집니다. 높은 지위를 무기 삼아 타인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지요.

나의 영역과 경계를 지킨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을 수 있어요. 미움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무의식적인 죄책감, 무능한 사람이라는 수치심이 습관처럼 올라올 테니까요. 그 불편한 감정을 조금씩 견디는 게 중요합니다. 힘의 행사를 잠재적인 위험으로 느끼게 된 개인적인 역사를 이해하는 시간도 필요해 보여요. 혹시 수진님의 삶에서 자유로운 감정 표현과 정당한 요구가 억압된 적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어린 수진님으로서는 뭔가가 맘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했을 텐데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마라”는 말은 더 큰 무력감과 부끄러움을 안겨줬을 것 같아요. 다들 나에게 실망해서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불편한 감정을 피하기 위해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느니 ‘예스맨’이 되는 길을 택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진님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억눌렸던 감정과 더불어 나의 경계를 지킬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한다면 좀 더 진정한 의미의 자기결정권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자신감을 되찾길 바랍니다.

박아름 | 심리상담공간 숨비 대표

한겨레 기자로 짧은 기간 일했다.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임상 및 상담심리학을 공부했고, 30대 상담자로서 내담자들의 자기 이해와 발견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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