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밀양 고정마을 주민 김영순씨가 지난 7일 경남 밀양시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농성장의 적막을 깬 건 ‘쿵쿵쿵’ 소리였다. 김영순 할머니(70)는 고개를 떨구고 쇠줄로 묶인 가슴을 바라봤다. 심장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 해 전 송전탑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나무를 잡고 버티다 굴착기에 나무뿌리 채 실려 나간 경험도 있는 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시선을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골길을 가득 메운 경찰의 군홧발 소리였다.

2014년 6월11일 새벽, 다리가 아파 농성장에 오르지 못한 정용순 할머니(76)는 자꾸만 김 할머니가 눈에 밟혔다. 전날 초저녁에 농성장으로 올라간 음식은 빵 60개, 우유 60개가 전부라 했다. 급한 대로 김밥을 말아 산을 오르는 수녀들의 배낭에 밀어 넣었다. 정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건 마당에 나와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행정대집행은 신속했다. 경찰은 자신을 농성장에 묶은 할머니들을 뜯어내고, 자르고, 날랐다. 철컥, 쿵, 쾅 하는 굉음들 소리들 사이에서 인간의 소리는 할머니들의 비명뿐이었다. 웅덩이가 되어버린 농성장을 보며 할머니들은 젖가슴을 내놓고 울부짖었다.

지난 7일 경남 밀양시 고정마을에 설치된 115번 송전탑 앞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정효진 기자


행정대집행으로부터 10년이 지난 7일,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마을 농성장 자리엔 115번 송전탑이 “비석처럼” 세워져 있었다. 송전탑은 ‘웅웅웅’ 소리를 내며 전기를 옮길 뿐이었지만, 고정마을 주민들은 송전탑에서 자꾸만 ‘쿵쿵쿵’ 하는 군홧발 소리를 들었다. “아들이 그래요. 저 철탑은 우리를 따라다니는 거냐고. 마을만 들어오면 어디서든 보이니께는.” 김 할머니는 창문 너머로 송전탑을 보며 말했다. 그는 이어 “어떻게 잊겠습니까. 전기 쓰는 서울 사람들이야 까먹겠지마는. 나는 자꾸 눈물이 나서...”라고 했다.

흉터조차 되지 못한 상처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서게 된 것은 한국전력이 ‘765㎸(킬로볼트)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추진하면서다. 울산 울주군 신고리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나르기 위해선 대규모 송전탑이 필요했다. 수도권의 지방 착취라는 논란이 있자, 한전은 종착지를 경남 창녕군 북경남변전소로 변경했다.

2005년 5월 초고압 송전선로가 마을을 관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밀양 주민들은 반대 투쟁에 나섰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송전탑 노선을 바꾸거나, 지하화해달라는 것이 주민들의 요구였다. 정 할머니의 남편 안병수 할아버지(75)는 “아는 한전 직원이 송전탑 얘기를 듣더니 ‘이유 불문하고 얼른 떠나라’고 했다”면서 “전자파가 그만큼 유해하다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2014년 농성장이 철거될 때까지 주민 요구는 같았지만, 한전은 사업성을 이유로 사업을 강행했다.

밀양 고정마을 주민 정용순씨가 7일 경남 밀양시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주민들은 송전탑을 ‘과거의 흉터’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 딱지조차 내려앉지 않은, ‘지금도 피 흘리는 상처’라고 했다. 송전탑 건설은 완료됐지만, 공사 과정에서 갈라진 마을 공동체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 할머니는 “한전이 사업에 찬성하는 주민들에게만 개별지원금을 주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갈라졌다”면서 “어느 집은 얼마를 받았다는 식으로 한전 직원들이 악의적인 소문을 냈고, 서로를 의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정마을은 송전탑 반대 과정에서 제초제를 먹고 목숨을 끊은 고 유한숙씨가 살던 마을이기도 하다. 안 할아버지는 “유씨가 죽고 얼마 안 있어서 그 아들도 자살했다”면서 “한전과 보상 문제로 소송하다가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마을 분위기가 어떻겠냐”고 말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음독 주민 10개월만에 영결식22일 오전 경남 밀양시 내이동 밀양농협 장례식장에서 밀양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주민 유한숙씨(당시 74세)의 영결식이 열렸다. 유씨는 지난해 12월말...https://www.khan.co.kr/national/incident/article/201410221629501

김 할머니도 “초상 날 때마다 다 같이 불 때고 밥 해 먹고, 명절에 밤새도록 장구치고 윷놀이하며 놀던 동네가 철탑 하나 때문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중에 보니 경찰들보다 무서운 건 이웃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김 할머니는 행정대집행 이후 마을이 찢어지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신경병을 얻었다고 했다. 발이 붓고, 잇몸이 조여드는 탓에 약 없이는 거동조차 힘든 상태였다.

송전탑으로 인한 전자파와 소음 탓에 농사를 포기한 이도 있었다. 이날 찾은 115번 송전탑 옆 자두밭은 버려진 채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송전탑과 가까운 나무는 바짝 말라 비틀어져 열매조차 맺지 못했다. 안 할아버지는 “자두 끝에 전자파 측정 장치를 달아 조사했는데 높은 수치의 전자파가 확인됐다”면서 “주인이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과수원을 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일 경남 밀양시 고정마을에 설치된 115번 송전탑 앞 전봇대에 나뭇잎이 말라있다. 정효진 기자


윤석열 정부의 원전 확대, 제2 제3의 밀양 만들 것

지난 8일, 경남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청도345kV송전탑반대공동대책위를 포함한 197개 단체, 1500여명의 시민들은 밀양 송전탑 6·11 행정대집행 10년째를 맞아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에 모였다. 10년 전 전국에서 송전탑 건설 반대에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이 탑승했던 ‘밀양행 희망버스’가 재현된 것이다. 이날 현장에 모인 시민들은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31일, 핵 폭주를 실현할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을 발표했다”면서 “또 다른 밀양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2038년까지 대형 원전 3기 추가 건설…시민사회 “기후위기 대응 포기”정부가 공개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대해 시민사회는 일제히 비판의 입장을 냈다.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이 너무 낮고, 원전 확대를 고집하며, 여전히 화석연료에 과...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5311439001

김은정 기후위기비상행동 운영위원장은 “삶터를 저당 잡혀 에너지를 생산하고, 이를 또 실어 나르기 위해 수백킬로 떨어진 곳의 피해를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부정의한 에너지 구조는 이제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정부는 핵발전소 4기를 더 짓고 게다가 2038년까지 그 어떤 노후 핵발전소 폐쇄도 없이 총 30기를 가동하겠다는 ‘에너지 탐욕’을 보여주었다”면서 “기후 위기를 심화시킴은 물론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밀양을 반복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10년 맞이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지난 8일 경남 밀양시 용회마을에 설치된 102번 송전탑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정효진 기자


경주 월성원전 주변에 사는 주민 황분희씨는 “핵발전은 기후위기의 대안이 아니다”라면서 “발전소가 내뿜는 방사능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피폭된 상태다.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정부가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인희 녹색연합 활동가도 “11차 전기본은 여전히 전기가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전기를 많이 쓰는 곳의 전기는 스스로 생산하고 책임져야지, 더 이상 장거리 송전과 지역의 희생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10년 맞이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지난 8일 경남 밀양시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정효진 기자

경향신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0401 육아 위해 노동시간 줄인 동료 일 대신하면 보상받는다 랭크뉴스 2024.06.18
40400 “집값 곧 오른다”…고개 드는 공급부족론 랭크뉴스 2024.06.18
40399 “김호중, 구속까지 될 일이냐” 팬들 눈물… 변호사 대답은 랭크뉴스 2024.06.18
40398 최태원 이혼 소송서 과거 주식가치로 쟁점 부상한 SK C&C는 랭크뉴스 2024.06.18
40397 [속보]정부 “개원의에 업무개시명령 발령…일방적 진료취소는 고발” 랭크뉴스 2024.06.18
40396 비디오 학습하는 AI 모델 ‘제파’, LLM 한계 극복할까[테크트렌드] 랭크뉴스 2024.06.18
40395 '尹 명예훼손 허위 인터뷰 의혹' 김만배·신학림 20일 구속심사 랭크뉴스 2024.06.18
40394 상장 앞둔 더본코리아, 돌발악재… 믿었던 간판 ‘연돈’에 발목 랭크뉴스 2024.06.18
40393 한국중증질환연합회 "의사들 불법 행동, 법대로 처리해야" 랭크뉴스 2024.06.18
40392 서울시 “시중에 유통되는 의약외품 마스크 50개 중 5개 품질 미달” 랭크뉴스 2024.06.18
40391 정부 "개원의에 업무개시명령 발령…일방적 진료취소, 고발조치" 랭크뉴스 2024.06.18
40390 동네병원마저 ‘휴진’… “동참 의원 불매” 여론 폭발 랭크뉴스 2024.06.18
40389 “아파트 대신 3억 몰빵”… 뜨거운 엔비디아 ‘투심 폭주’ 랭크뉴스 2024.06.18
40388 ‘AI 변호사’ 무료 챗봇…변협이 징계절차 돌입한 이유 [뉴스AS] 랭크뉴스 2024.06.18
40387 ‘코뼈 골절’ 수술 받은 음바페···남은 유로대회 뛸 수 있을까[유로2024] 랭크뉴스 2024.06.18
40386 정부 “개원의에 업무개시명령, 일방적 진료취소 시 고발” 랭크뉴스 2024.06.18
40385 노종면 “애완견이냐, 감시견이냐는 보도로 평가받는 것”…계속되는 ‘언론 애완견’ 논란 랭크뉴스 2024.06.18
40384 [속보] 정부 “개원의에 업무개시 명령…일방적 진료 취소엔 고발” 랭크뉴스 2024.06.18
40383 이정재, 이번엔 소액주주에 발목... 래몽래인 인수 쉽지 않네 랭크뉴스 2024.06.18
40382 어떻게 인권위원 됐나‥막말·폭언·기행 이력까지 랭크뉴스 2024.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