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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 편백나무 치유의 숲'에서 발견된 대벌레 성충의 모습. 이곳에는 지난 2020년 대벌레가 집단 발생한 이후 3년 동안 12회에 걸쳐 살충제 희석액 약 9,200리터가 살포됐다.


서울 북서쪽 가장자리에 봉산이라는 이름의 나지막한 산이 있다. 높이 약 209미터의 봉산은 서울 은평구 수색동을 시작으로 구산동까지 남북으로 길쭉한 띠 모양으로 이어진다. 산 능선을 중심으로 서쪽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동쪽은 서울 은평구와 접해 있다. 지명 자체는 다소 생소하지만, 봉산은 지난 2020년부터 거의 매해 대벌레,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 등 곤충이 집단 발생하며 미디어에 여러 번 노출된 바 있다. ‘특정 자연현상(곤충 대발생)이 한 지역에서 집중하여 발생하는 데는 어떠한 원인이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봉산을 들여다봤다.

은평구가 봉산 대벌레에 대한 친환경 방제 수단으로 도입한 '끈끈이롤트랩' 위로 새우게거미(왼쪽부터), 무당벌레, 뱀잠자리붙이 등 각종 벌레들이 무작위로 붙어 있다. 나무를 통로 삼는 모든 생물들에게 덫으로 작용하는 이 끈끈이롤트랩은 지극히 비특이적이어서 어느 한 종 만을 표적 방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봉산을 끼고 있는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심심찮게 ‘편백나무’가 언급되고 있었다. 은평구가 2014년부터 진행 중인 ‘봉산 편백나무 치유의 숲(힐링 숲)’ 사업의 영향이다. 이 사업은 기존 산림을 베어낸 자리에 편백나무 숲을 조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은평구는 ‘서울시 최초의 편백나무 숲’ 타이틀을 걸고 지난 10년 동안 봉산 내 6.5㏊ 규모 산지에 약 1만3,400그루의 편백나무를 심어왔다. 이와 더불어 은평구는 ‘봉산 무장애숲길’이라는 이름으로 봉산을 가로지르는 총 9.8㎞ 길이의 대규모 덱길(휠체어 산책로)을 조성 중이다. 이런 사업에 대해 구청이 발행한 보도자료들을 살펴본 결과, 대체로 새롭게 조성된 공간의 가치를 수치화해 강조하고 있었다. 원래 있던 숲이 다 사라졌다는 사실은 '1만3,400그루', '9.8㎞' 등 압도적인 숫자들에 대부분 가려져 있다.

‘편백나무 치유의 숲’, ‘무장애숲길’ 조성 사업 전후 봉산을 촬영한 위성사진. 왼쪽은 2011년, 오른쪽은 2022년 모습. 카카오맵 캡처


봉산 편백 숲을 다룬 기사마다 따라다니는 ‘서울시 최초’라는 수식은 어떠한가. ‘기후 특성상 서울에 자생하지 않는 종을 외부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또한 마냥 추앙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현장을 찾은 엄태원 숲복원생태연구소장은 30~40도에 이르는 경사지에 식재된 편백나무를 가리키며 “수분·양분 요구도가 높은 편백나무는 배수가 빠르고 수분 함량이 적은 경사지에서는 제대로 자라기 어려운 수종”이라며 “대부분 개체가 극심한 수분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인공 급수가 없으면 자생할 수 없는 상태다”라고 지적했다.

봉산 동쪽 사면에 식재된 편백나무들의 가지마다 동그란 열매가 열려 있다.


봉산 편백나무 조림지에는 구석구석 물탱크와 양수기 등 인공 급수시설이 위장막에 덮인 채 설치돼 있다.


영양생장에 집중해야 할 시기의 어린 편백나무들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는데, 이를 본 엄 소장은 “묘목들이 생식생장을 보이는 건 ‘나 여기서 못 살겠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이토록 건조하고 경사진 땅에 편백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난 4일 봉산 동쪽 사면 가좌로 방면 벌목·조림지의 지표면 온도를 측정한 결과, 오후 1시 기준 49.8도까지 상승했고 습도는 20%를 나타냈다. 같은 시간대 동일한 사면에 위치한 자연림은 온도 25.9도, 습도 31%를 기록하며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지난 4일 봉산 동쪽 사면 가좌로 방면 벌목·조림지의 경사도를 측정한 모습. 경사도가 30도 중반에서 40도 후반까지 이르는, 안정적으로 서 있기 어려운 급경사지에 편백나무 묘목들이 식재돼 있다.


숭실고 방면 봉산 급경사지가 민둥산의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장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편백나무 식재를 목적으로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숲을 개벌했으나, 암반 지대임이 뒤늦게 밝혀지며 편백나무를 심는 데 실패하고 대신 꽃잔디를 심었다고 한다. 상시로 인공 급수를 하는 등 관리를 하고 있지만 꽃잔디의 활착률이 낮아 군데군데 맨땅이 드러나 있다.


‘치유의 숲’이라는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사업은 자연에서 사람으로 향하는 서비스(피톤치드, 심미성)에 집중돼 있다. 편백나무 숲을 조림하고 휠체어 산책로를 건설해 이들을 토대로 사람들이 ‘힐링’하는 동안 동일한 면적의 숲이 통째로 사라졌지만, '숲을 치유하자'는 목소리는 소수에 그친다. 그 뒤 나타난 대벌레 집단 발생에 대한 후속조치로 살충제 희석액 9,200리터가 봉산 일대에 뿌려졌다. 그러곤 곧이어 러브버그가 대발생했다.

봉산 전망대 인근에 설치된 '곤충호텔' 모습. '무분별한 농약 사용에 시달리는 곤충들의 대피소입니다'라는 시설 설명문과는 대조적으로 이 호텔 바로 옆 나무 두 그루에는 벌레를 무작위로 포획하는 '끈끈이롤트랩'이 감겨 있다. 현장에서 이를 본 성민규 생명다양성재단 연구원은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 입구에 지뢰 지대를 설치한 것과 같은 격이다"라고 설명했다.


끈끈이롤트랩에 갓 포획된 달무리무당벌레가 점액질 표면 위를 기어오르고 있다.


화학적 방제(살충제 살포)가 다른 생물들에게 예측 불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나오자, 2022년부터는 구청이 주도해 '친환경' 방제 수단으로 등산로 주변 나무마다 끈끈이롤트랩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대벌레를 방제하는 데 성공했고 '생태계 건강성 유지에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도 나왔지만, 실제 현장에서 확인한 이 끈끈이롤트랩은 대단히 '비특이적'이어서 숲에 사는, 나무를 통로로 삼는 곤충들을 무작위로 잡아내고 있었다.

봉산 등산로를 따라 줄줄이 설치된 친환경 '끈끈이롤트랩' 모습.


나무마다 설치된 끈끈이롤트랩은 종을 가리지 않는다. 박새의 꽁지깃으로 추정되는 깃털이 끈끈이롤트랩에 본드 같은 점액질과 범벅이 된 채 붙어 있다.


봉산은 짧은 기간 급격한 환경변화를 겪어왔다. 그 숲을 보금자리 삼았던 뭇 생명들이 받았을 악영향은 자명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은 “대벌레를 비롯한 곤충들, 변온성 동물들은 온습도 변화에 굉장히 민감하다”면서 “넓은 잎을 가진 활엽수종과 달리 편백나무 같은 침엽수는 태양광을 그대로 통과시키면서 지표면의 복사열을 높이는데, 자연히 고온에 내성이 있는 곤충이 더 번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4일 봉산 동쪽 사면 가좌로 방면 벌목·조림지의 지표면 온도(왼쪽 사진)를 측정한 결과, 오후 1시 기준 49.8도까지 상승했고 습도는 20%를 나타냈다. 같은 시간대 동일한 사면에 위치한 자연림은 온도 25.9도, 습도 31%를 기록하며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편백이 활착에 실패한 자리마다 큰금계국이 공백을 메우고 있다. 국립생태원은 지난 2018년에 외래종 식물 위해성 평가에서 큰금계국을 2급으로 판정했다.


현재 봉산의 숭실고 방면 급경사지에서는 꽃잔디를 식재하는 ‘꽃동산’ 조성 작업이 한창이다. 사람들이 물 호스와 스프링클러를 동원해 수시로 급수에 나서고 있지만, 가파른 경사 탓에 활착률이 낮아 꽃동산은 민둥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현장 관계자는 “원래 편백나무를 심으려고 나무를 다 밀었는데 밀고 보니 암반 지대라 편백은 실패하고 대신 꽃잔디를 심었다”면서 “비록 2~3주지만 그때 피는 꽃이 아름다워 너무 좋다”고 귀띔했다.

잎벌류로 추정되는 개체가 끈끈이롤트랩에 포획돼 몸부림을 치고 있다.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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