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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백패킹 남덕유산

40도 경사 계단 세며 성큼성큼
화기 사용할 수 있는 대피소에서
고기에 라면…8살 인생 ‘특별경험’
남덕유산 정상을 향해 계단을 오르고 있는 8살 아들의 모습.
초록이 짙게 물든 5월의 아침, 청쾌한 숲 내음과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우리를 반겨주는 이곳은 덕유산 국립공원이다. 경남 함양군에 있는 영각사를 출발해 사박사박 등산로를 500m쯤 걸어 오르니 탐방지원센터의 직원들이 우리를 마중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심폐소생술 교육 받아보셨나요?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기 전, 아이와 함께 실습해 보는 건 어떠세요?” 나와 아들은 흔쾌히 배낭을 내려놓고 폭신한 매트 위에 놓인 교보재 곁에 다가가 앉았다. “1분에 100회에서 120회 속도로 가슴 중앙을 압박해야 해요. 조금만 더 빨리해볼까요?” 직원의 설명에 따라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어 깍지를 끼고 가슴 압박을 해봤지만, 만 8살 아이에겐 아직 쉽지 않다. “저는 119 신고를 맡는 ‘주변 사람’을 할게요, 아무래도 심폐소생술은 아빠가 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겠어!”라며 물러서는 아들의 한마디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1박2일 13㎞ 산행

오전 10시, 영각탐방지원센터 앞의 목재 계단을 오르며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됐다. 초여름 더위가 이어지던 5월의 마지막 토요일,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무렵엔 반소매를 입기에 어색함이 없는 날씨였는데, 산속으로 들어오니 긴 팔 티셔츠에 윈드재킷을 덧입었어도 한기가 느껴졌다. 긴 오르막의 너덜지대를 오른 끝에 쉼터에 다다랐다. 아들은 안내도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어디랬지? 남덕유산 정상석을 지나서 더 멀리 가야 한다고 했잖아?” 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맞아, 남덕유산과 삿갓봉을 지나 삿갓재대피소에서 하룻밤 쉬고, 내일 황점마을로 내려갈 계획이야. 그러고 보니 국립공원 대피소는 처음이네, 아들?”

영각사를 출발한 우리는 남덕유산(1507m)과 삿갓봉(1418.6m)을 거쳐 경남 거창군 북상면 황점마을까지 이어지는 약 13㎞의 산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이에겐 만만치 않은 코스다. 다행히 하룻밤 쉬어 갈 수 있는 삿갓재대피소가 중간지점에 있었기에 욕심 내본 여정이었다. 야영 장비는 필요치 않기에 여느 백패킹보다 배낭은 가볍다. 황점마을과 대피소를 잇는 4.2㎞의 등산로를 제외한 삿갓재의 모든 코스는 산불조심기간 동안 입산이 통제된다. 3월4일부터 4월30일까지 약 2개월에 걸친 봄철 탐방로 통제 기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한적한 등산로를 오르는 발걸음은 경쾌했다.

영각재(1283m) 앞에서 가파른 산등성 위에 설치된 긴 계단 길이 시작되었다. 여기부터 남덕유산 정상까지는 900m 거리. “계단이 총 몇 칸일까, 아빠?” 덕유산을 다룬 한 티브이(TV)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기억을 더듬으며 “음…아마 700여개쯤?”이라 답을 했다. “나랑 같이 세어보자. 정상까지 계단이 총 몇 개인지! 자,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아들이 먼저 계단의 개수를 세며 오르고, 난 그 뒤를 따르며 검산을 맡았다. 500번째 계단을 오를 무렵, 운무 속에 어우러진 장쾌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남덕유산의 웅장한 산세를 감상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봉우리로 향했다. 짧은 내리막 끝에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 계단의 경사는 40도에 이른다. 언제 이만큼 성장한 걸까. 나는 한 칸의 높이가 자신의 무릎만치 되는 깊은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는 아들을 부듯한 눈으로 좇으며 함께 호흡했다.

“847, 848, 849, 정상이다!” 오후 2시, 드디어 남덕유산 정상에 올랐다. 삿갓봉과 서봉을 조망하는 바위 한편에 앉아 과일 도시락을 꺼낸 아들은 연신 싱글벙글. 결코 쉽지 않은 산행이었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과 더불어 경상북도와 전라북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풍경,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까지, 아이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산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니!”

남덕유산 정상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아빠와 아들.
“아빠, 그럼 오늘은 텐트 안 치는 거야? 대피소에서는 텐트 없이 잘 수 있어?” 내 배낭에 야영 장비가 없음을 깨달은 아이가 물었다. 지리산·설악산·소백산·덕유산 국립공원 대피소에는 장거리 산행을 계획한 등산객들이 하룻밤 머물 수 있는 숙소가 있고 또 이들 대피소는 국립공원에서 화기 사용이 허락된 유일한 장소라는 설명 끝에, 텐트 대신 넉넉히 챙겨온 돼지 항정살과 가브리살, 김치볶음, 라면 등 저녁 메뉴를 언급하자 아들은 쾌재를 불렀다. “우와! 그럼, 우리 오늘 저녁엔 고기 구워 먹는 거야? 라면도 끓이고? 신난다!” 지난 수년 동안 보온병 온수로 익힌 컵라면과 완조리 식품으로 산행을 즐긴 아이에게 있어 첫 국립공원 대피소 경험은 미지의 세계였다.

월성재(1218m) 앞을 지날 무렵 맞은편에서 두 명의 성인남녀와 함께 오르던 70대의 어르신이 아들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야, 널 보니 서른 해 전 생각이 나는구나. 이 녀석을 끌고 지리산 천왕봉을 올랐었는데.” 그러자 곁에 있던 성인 남성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아버지. 그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어요. 정말 힘들었는데, 문득 그립네요. 꼬마야, 너도 아빠와 함께한 기억이 오래도록 남을 거다. 힘내서 끝까지, 꼭 성공해!” 아들은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걸음을 이으며 말했다. “지리산은 정말 힘든 산인가 봐. 저 삼촌이 아직도 힘들었다고 기억하는 걸 보면.”

오후 6시, 드디어 우린 삿갓재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앞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젊은 청년들과 중년의 산행객들이 손뼉을 치며 아들을 반겨주었다. 총 44개 중 26개(60%)의 침상만 운영 중인 덕에 대피소는 여유로웠다. 대피소 앞마당의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레 버너에 불을 댕기고 지름 20㎝ 팬 위에 가브리살·항정살을 가지런히 얹었다. ‘치이익’ 고기 익는 소리에 군침이 돌았다. 갓 구워진 고기 한 점 입에 문 아들이 말했다. “음! 맛있다! 산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니, 신기해!” 그동안 백패킹을 다니며 산에서 불을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온 데 대한 반응이었다.

저녁 식사를 든든히 마친 우리는 가로 폭이 세 뼘 남짓한 침상에 몸을 눕혔다. 저녁 9시, 실내를 밝혀주던 등이 꺼진 숙소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다음날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하는 산행객들의 편안한 휴식을 위한 배려인 셈이다. “잘 자, 아빠!” “서진이도 굿나잇!” 각자의 침낭에 몸을 맡긴 우리는 대피소의 낭만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글∙사진 박준형 작가

평일에는 세종시와 여의도를 오가며 밥벌이를,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배낭을 메고 전국의 산과 섬을 누비고 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자연으로 한 걸음 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책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를 썼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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