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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농협 운영 ‘기찬장터’ 트럭
고령화·소멸지역 30곳 찾아가
전남 영암군 영암읍 영암농협의 이동형 슈퍼마켓 ‘동네방네 기(氣)찬장터’ 차량에 달린 음향시설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민들 모습. 영암농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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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암읍 대부분 동네엔 점방(구멍가게) 한 군데가 없습니다. 마을서 버스 타고 읍내까지 나가야 마트가 있는데, 아이스크림은 마트에서 사 갖고 오다 보면 다 녹아불잖아요.”(박도상 전남 영암군 영암농협 조합장)

영암군 영암읍 송평2리 평장마을에는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을 가게가 없다. 마을 사람들에게 가게의 기억을 물어보면 “점방이 하나 있었지, 30년 전쯤” 하는 아득한 답이 돌아온다.

30여년 전, 마을에 하나 있던 점방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저 구멍가게의 영업 종료였으나, 돌아보면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마을 주민도 그동안 3분의 1 정도로 줄었다. 2024년 평장마을에는 78명이 산다. 대부분 70대 노인이다. 가게가 없어 인구가 줄어든 건지, 사람이 떠나 가게가 사라진 건지 따지긴 쉽지 않다. 분명한 건 점방과 사람의 존재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동네, 작은 식료품 가게조차 없어 ‘식품 사막’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영암읍에만 30개다.

지난달 23일 오전 전남 영암군 영암읍 송평2리 평장마을 주민들이 영암농협의 이동형 슈퍼마켓 ‘동네방네 기(氣)찬장터’에서 장을 보고 있다. 김채운 기자

물건은 넘쳐나고 새벽배송도 느리다며 당일배송까지 등장한 시대, 사소한 식료품 하나가 귀했던 평장마을이 지난달 23일 돌연 시끌벅적해졌다. 요란하게 트로트를 울리며 당도한 트럭 한 대 때문이다. ‘동네방네 기(氣)찬장터’(기찬장터)라고 적힌 트럭은 신선식품부터 가공식품, 현금자동입출금기(ATM)와 노래방 시설까지 갖췄다. 기찬장터는 영암농협이 2022년 4월부터 운영하고 있는 이동형 슈퍼마켓이다. 하루에 세 곳씩, 식료품점이 없는 영암읍 30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다. ‘점방’이 30년 만에 트럭의 모습을 하고 돌아온 셈이다.

갓 구매한 쇠고기 육회와 소주를 부려 놓고 트럭 옆 평상에 노인들이 둘러앉았다. “아야 기찬장터 점장, 일로 와봐야. 노래도 쪼까 빵빵하게 틀고, 어르신들헌테 노래도 한 곡조 허시라고 권장도 하고.” 마을 이장 이계중(70)씨의 부름에 기찬장터 직원 양동찬(41)씨가 멋쩍은 표정으로 짐짓 자세를 고쳤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쥔 할머니들이 그 모습에 깔깔 웃었다. 생고기와 아이스크림은 뜨거운 날씨에 ‘식어불고 녹아부러서’ 읍내에서 사 올 엄두도 못 낼 것들이라, 평장마을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

왁자지껄한 웃음이 진심인 건, 그간 마을이 겪은 물건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간단한 식료품조차 살 만한 가게가 없는 마을의 증가를 의미하는 ‘식품 사막화 현상’은 인구 고령화·소멸 지역의 두드러진 단면이다. 5년마다 이뤄지는 통계청 농림어업 총조사를 보면, 2020년 기준 전국 행정리(농산어촌 지역의 최소 행정단위) 3만7563곳 가운데 73.5%인 2만7609곳에 식료품 소매점(슈퍼마켓·편의점 등)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식품 사막’에 사는 사람들을 일본은 ‘장보기 난민(쇼핑 난민)’이라고 부른다. 집에서 식료품점까지의 거리가 500m 이상이고, 자동차 이용이 어려운 65살 이상 고령자로 규정한다. 지난 4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의 65살 이상 고령자 4명 중 1명이 장보기 난민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무거운 거 안 들고 댕기니께 좋제. 저번엔 다이(빨래 건조대)도 하나 샀어.” 기찬장터에서 산 달걀과 콩나물을 내보이는 평장마을 주민 박순임(70)씨도 장보기 난민에 속한다. 다리가 불편한 박씨에게 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나가 물건을 사 오는 건 큰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거창한 물건도 아니다. 세제나 생수처럼 일상적이고, 그래서 필수적인데 무거운 물건이 특히 말썽이었다. 날씨 궂은 날, 그 무게를 감당하며 읍내를 오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기찬장터의 역할은 장보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은행, 약국, 복지시설 등 마을이 갖추지 못한 다양한 인프라를 메우는 노릇도 한다. 기찬장터에 현금자동입출금기와 노래방 기기까지 실려 있는 이유다. 담당 직원 양동찬씨는 “기초연금이 들어오는 날이면 어르신들이 자동입출금기 앞에 줄을 선다”며 “물건 말고도 개인적으로 약 같은 게 필요하다 하시면 제가 읍내에서 사다 드린다”고 말했다.

이동형이나마 단비 같은 ‘점방’을 되찾게 된 평장마을 주민의 기쁨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다. 지속가능성도 담보되지 않는다. 기찬장터와 비슷한 이동형 슈퍼는 전북 정읍시 샘골농협, 경기 포천시 소흘농협 등 일부 지역 농협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거나, 전남 영광군 묘량면 ‘여민동락공동체’처럼 마을 공동체가 직접 돈을 걷어 운영하는 정도에 그친다. 수익이 나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을 겪지만 별다른 정부 지원은 없다.

영암농협 관계자는 “물건은 마트 가격 그대로 파는데 차량 관리비, 기름값, 직원 인건비까지 들어가니 수익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인 사업”이라며 “시골 어르신들 복지 차원에서 의지를 갖고 하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샘골농협 관계자도 “차량 수리·유지비 때문에 명절이나 농번기에만 잠깐 운행하고 있다”며 “인건비 때문에 전담 직원도 없어, 농협 직원들이 돌아가며 시간을 쪼개 겨우 운영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지난달 23일 오전 전남 영암군 영암읍 송평2리 평장마을 주민들이 영암농협의 이동형 슈퍼마켓 ‘동네방네 기(氣)찬장터’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고 있다. 김채운 기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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