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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경기도 수원의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팬텀 F-4E 743호가 이륙하고 있다. 사진 공군
#. 1969년 8월 29일 대구 공군기지. 이재우 공군 중령(당시 35세)을 비롯한 6명의 조종사가 한국 공군의 첫 팬텀기(F-4D)에서 내려 고국 땅에 발을 디뎠다. 미국에서 팬텀을 직접 몰고 태평양을 건너온 이들을 보며 인파는 환호했지만, 정작 역사적 ‘1호 조종사’의 영예를 안은 이 중령은 활짝 웃지 못했다. “큰 기대만큼 책임이 막중하다.”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감을 오히려 원동력으로 삼아 그는 그날 이후 3000시간 동안 팬텀과 함께 ‘도깨비불’을 뿜으며 영공을 수호했다.

#. 그로부터 55년이 흐른 지난달 27일 경기도 수원의 공군 10전투비행단. 신현철(47) 정비 기장(상사)이 랜턴을 들고 팬텀 F-4E 743를 구석구석 살폈다. 그가 전담 정비하는 743호는 ‘막내 팬텀’. 공군이 현재 보유한 팬텀 약 10기 가운데 가장 마지막인 1978년 생산됐다. 동갑뻘 전투기에 청춘을 바친 그는 ‘마지막 정비사’로서 떠나는 팬텀 곁을 끝까지 지킬 예정이다.

1960~90년대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팬텀이 오는 7일 퇴역식을 끝으로 전기종 임무를 중단하고 퇴역한다. 팝아이 공대지미사일(AGM-142) 등으로 무장한 팬텀의 별명은 ‘하늘의 도깨비’. 북한군에겐 존재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팬텀과의 작별을 앞두고 1호 조종사와 마지막 정비사를 각각 만나 팬텀의 ‘시작과 끝’을 짚어봤다. 팬텀을 맞이하는 첫 임무와 보내는 마지막 임무 사이 55년이란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의 ‘팬텀 사랑’은 결이 같았다. 이들은 “팬텀이 있었기에 한국이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엔진 소리만 들어도 알아보는 내 아이”
지난달 27일 경기도 수원의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팬텀 전투기의 '마지막 정비사' 신현철 상사를 만났다. 사진 공군
수원 공군기지의 이글루(격납고) 안에서 신 상사가 막내를 살펴보는 사이 바로 옆 활주로에선 또 다른 팬텀 두 대가 편대 임무를 위해 날아 올랐다. 퇴역식 직전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신 상사는 이날도 아기 어루만지듯 타월로 기체와 캐노피 등 팬텀의 외관을 살살 닦아내며 하루를 시작했다. 엔진 속으로 직접 들어가 불순물이 끼어 있는지 정밀 점검도 한다. 출격 전후 한 시간씩 정비사들의 보이지 않는 구슬땀 속에 팬텀이 뜨고 내린다.

신 상사는 “내 차도 손 세차를 해본 적이 없는데, 기체는 손으로 일일이 닦아야 미세 결함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조종사들의 생명이 걸려 있으니 아주 작은 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후 기종이라 특히 세심히 살펴야 한다”면서다.

1996년 하사로 임관한 그는 경력 내내 팬텀 정비를 도맡았다. 그가 퇴역 시킨 팬텀만 6대다. 공군이 한 때 100대 넘게 보유했던 팬텀은 F-15K 등 도입으로 순차 퇴역했고, 약 10대만 남았다.

신 상사는 팬텀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묘사했다.

“정비사마다 전담 항공기와의 궁합이 있습니다. 같은 기종이라도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에 처음엔 성질도 내고, 여기저기 아프곤 하죠. 그러다 함께 비상 대기근무(ALERT) 당직도 서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궁합을 맞춰가게 됩니다. 이제는 멀리서 엔진 소리만 들어도 ‘얘가 들어오는구나’ 알 수 있어요.”

2002년 6월 18일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 16강전도 팬텀과 함께 한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제2연평해전(6월 29일) 직전, 이미 북한의 도발 징후가 감지돼 군은 긴장 태세였다. 조종사는 팬텀의 조종석에서, 신 상사는 기체 바로 옆에서 언제든 출격할 수 있도록 대기했다. TV는 당연히 볼 수 없었고, 8강 진출을 확정한 안정환 선수의 골 소식은 라디오 중계로 들었다. 신 상사는 “순간 다들 너무나 기뻐하면서도 군인으로서 단 한 명도 자리 이탈 없이 위치를 지켰던 게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정비사들은 이륙 점검의 제일 마지막에 하는 ‘루틴’이 있다”고도 소개했다. 안전 비행을 기원하며 반복하는 일종의 짧은 의식이다. 신 상사는 반드시 기체 뒤에 서서 전체 모습을 한번 훑어야 하고, 어떤 정비 기장은 양쪽 윙(날개)을 한번씩 손으로 쓸어주고 내보낸다고 했다. 신 상사는 마지막 비행까지도 이 ‘루틴’으로 팬텀을 배웅할 생각이다.

“팬텀을 한 명 한 명 보내며 아깝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임무는 마지막 한 대의 비행까지 안전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팬텀과 함께라면 지금도 北과 싸워 이길 것”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가 5일 오후 서울 중구 동국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패기 넘치던 30대 공군 엘리트 조종사는 이제 백발이 됐다. 세월은 전우들을 먼저 데려갔고, 이제는 팬텀마저 보내줄 차례. 이재우(90·예비역 소장)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석좌교수는 1969년 팬텀 도입식에 참석했던 6명의 ‘1호 팬텀 조종사’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나는 팬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비역 팬텀 전투 조종사라고 해주세요. 국가의 부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공헌할 겁니다.”

지난 5일 동국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팬텀 조종간을 처음 잡은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첫 팬텀 인수를 위해 미국 애리조나에서 교육을 받을 때였다. 그는 “처음 활주로에서 (조종간을)쭉 당기며 가는데, 육중하면서도 너무 부드럽게 잘 나갔다. 출력이 좋으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기체가 뛰어 올랐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제서야 미국이 왜 처음에 한국에 팬텀을 안 주려고 했는지 알았다”고 말했다.

미국 맥도널 더글러스(MD)가 개발한 팬텀은 196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하며 최강 전투기로 불렸다. 한국이 도입을 희망하자 미 측은 난색을 표했다. 1968년 1월 김신조 등 북한 무장 공비 청와대 뒷산 침투 사건 등이 터지며 정세가 격화한 게 오히려 기회가 됐다. 이 교수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강하게 밀어붙여 최신예 전투기를 들여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 등은 당초 미국에서 6개월 간 조종사 훈련 교육만 받을 예정이었지만, 본국에서 최대한 빠른 공수를 요구해 직접 팬텀을 조종해 귀국했다. 한국 공군이 미 측으로부터 공중 급유를 받으며 전투기를 몰고 태평양을 횡단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공군 소장으로 예편하기까지 6000시간의 비행 중 3000시간을 팬텀과 함께 했다. 이 교수는 “작전 보안상 자세한 일화를 소개할 순 없지만, 백번이면 백번 팬텀이 북한의 위협을 억제했다”며 “바람에 날아가는 풍선까지 잡아낼 정도의 최강 전투기였다”고 말했다.
현역 시절 이재우 교수가 팬텀 앞에서 찍은 사진. 이재우 교수 제공

퇴역식을 앞두고 최근 그는 공군의 협조로 팬텀 조종석에 다시 앉을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팬텀을 조종하던 때처럼 익숙했어요. 이대로 몰고 나가 지금이라도 북한과 전투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팬텀이 있어 우리 공군은 적 후방에 깊숙이 들어가 폭격할 수 있는 ‘전략 공군’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습니다. 팬텀 도입은 역사의 이정표로 남을 사건입니다.”

조종석에서 내려온 노장은 팬텀 기체를 힘껏 껴안았다. ‘이제 정말 헤어지는구나. 고생 많았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뒤를 돌아보니 늠름하게 서 있던 대대장의 눈이 새빨개져 눈물이 고여 있었고, 그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그는 “나에게 팬텀은 아끼고 아꼈던 예술 작품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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