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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한 대로변 인도에서 참외를 팔고 있다. 강한들 기자


지난 4일 오후 9시 50분쯤 서울 종로구의 한 대로변 인도에서 볕가림모자(선캡)을 눌러쓴 할머니가 “참외 사가세요, 진짜 맛있어요”라고 읊조리듯 말했다. 이따금 80데시벨이 넘는 굉음과 함께 시내버스가 지나면 잘 들리지도 않았다. ‘1만원 꿀참외’라 적은 스티로폼 앞에 놓인 빨간 소쿠리 11개엔 샛노란 빛깔 참외가 담겨 있었다.

이날따라 작은 노점에 젊은이들이 발길이 이어졌다. 지난 3일 인근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계기였다. ‘할머니가 덜 힘드셨으면 하는 마음에 홍보한다’는 제목의 글이었다. 작성자는 “새벽 3시 가까이 앉아서 ‘참외 사세요’ 하고 외치는 할머니가 있다”며 “최근엔 과일값이 너무 올라서 그나마 싼 참외를 떼다가 파신다”고 적었다. 글쓴이는 “생계를 위해 하시는 것 같은데 모양은 안 예쁘지만 맛없는 과일은 안파시니 근처 자취생은 들러서 과일을 사보라”고 제안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이어졌다. 한 학생은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서 참외를 샀었는데 그 이후로 지갑에 현금 만원은 꼭 넣고 다닌다”며 “일찍 퇴근시켜드리고 싶은 마음에 글까지 올린 거 보니 따뜻하다”고 남겼다. 다른 학생이 “내가 다 살 거다”고 댓글을 남기자 “착쁜놈(착하지만 나쁜 놈)아 내 거 남겨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온라인에서의 관심으로 그치지 않았다. 늦은 시간 노점을 찾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할머니가 일찍 들어가셨으면 좋겠다”며 A씨를 찾아왔다. 오후 10시 “계좌 이체도 되냐”고 묻는 학생이 참외 한 소쿠리를 샀다. 오후 11시쯤 노점을 찾아온 김민아씨(24)는 일부러 은행에서 현금을 뽑아 왔다고 했다.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인 김씨는 “지난주에도 왔었다”고 웃으며 참외 한 소쿠리를 챙겨 들었다. 그는 “학생 커뮤니티에서 글을 보고 알게 됐다”며 “귀갓길은 아니지만 운동 삼아 맛있는 참외를 사러 왔다”고 말했다.

자정을 넘어 지하철 막차가 끊기자 행인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초여름 서늘한 기운이 드는 밤공기와 자동차 매연 탓에 두건과 마스크, 긴소매 외투로 무장하고 쪼그려 앉은 A씨는 고개를 숙이고 졸기 시작했다. 버스 소리에도 미동이 없던 그는 행인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고 “참외 진짜 맛있어요”라고 읊조렸다. 낮에는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교외로 참외를 사러 가고, 끼니는 보온병에 담아온 밥으로 거리에서 해결한다고 했다. “이거 밖에 할 줄 몰라서.” 그가 길에서 쪽잠으로 눈을 붙이는 이유다.

5일 오전 1시30분 노점 주변은 한적했다. ‘언제 집에 가시냐’는 질문에 “다 팔아야 집에 가지. 동틀 때까지도 있어”라고 답했다. 아직 팔리지 않은 참외가 다섯 소쿠리나 남았다. 그나마 이날은 평소보다 많이 팔렸다고 했다. 참외를 쓰다듬는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참외의 노란 빛깔은 고왔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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