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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만에 연극 무대 선 전도연
체호프 원작, 한국 배경으로 바꿔
고전 재해석 탁월한 연출가 스톤
이질감 없는 번역도 관객 몰입 높여
연극 <벚꽃동산>의 황두식(박해수·왼쪽)과 송도영(전도연). LG아트센터 서울 제공


4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한 연극 <벚꽃동산> 포스터에는 배우 전도연과 박해수가 자리했다.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전도연은 2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섰고, 박해수는 <오징어게임>으로 스타가 됐으니 자연스러운 배치다.

정작 연극을 보면 이들은 극을 장악하지도,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극의 흐름 속에서 주어진 ‘n분의 1’ 역할만 수행한다. 이는 혹평이 아니라 호평이다. <벚꽃동산>은 등장인물 10명의 캐릭터, 욕망, 서사가 저마다의 가능성을 갖고 꿈틀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사회라면 그럴 법한 모습으로, 한 인물은 다른 인물의 가능성을 방해하거나 스스로 희생하지 않는다.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6개월 전 무대에 올린 마지막 작품이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원작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 이야기였다. 호주 국적의 사이먼 스톤은 고전의 재해석에 재능을 발휘해온 연출가다. 그는 <벚꽃동산>을 2024년의 한국 배경으로 옮겼다. 원작의 귀족 남매는 기업 후계자들로, 농노의 아들로 상인이 돼 큰 부를 축적한 로파힌은 선대 회장 운전기사의 아들로 성공한 사업가가 된 황두식으로 바뀌었다.

극 중 대사처럼 “아름다운 콩가루 집안” 이야기다.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 미국 뉴욕으로 갔던 송도영(전도연)이 5년 만에 귀국하며 막이 열린다. 송도영이 16세 때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아름다운 집이 주요 배경이다. 그사이 회사를 맡은 오빠 송재영(손상규)은 음악과 철학에 조예가 깊을지언정, 경영에는 무능하다. 황두식(박해수)은 망해가는 기업을 살리기 위해 온갖 제안을 하지만, 송씨 남매는 별 관심이 없다. “돈 얘기하는 거 싫다”거나 “내일 얘기하자”거나 다짜고짜 화를 낸다. 송씨 남매는 위험을 감지하면 머리를 파묻고 외면하는 타조 같은 존재들이다.

송도영의 입양한 첫째 딸 강현숙(최희서)은 부사장으로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의 능력은 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이기지 못한다. 둘째 딸 강해나(이지혜)는 미국에서 알코올과 연애에 중독된 엄마를 뒷바라지하느라 ‘엄마의 엄마’가 된 기분이다. 송씨 집안의 과외 교사였던 변동림(남윤호)은 반자본주의적 혁명의 가능성을 부르짖는 지식인이지만, 그의 세 번째 박사 학위는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데조차 소용이 없다.

저마다의 결함으로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이들이 모여 벌이는 일들은 희극적이다. 객석에선 자주 폭소가 터졌다. 스톤이 쓴 대사를 드라마터그(극작가·연출가를 돕는 예술적 컨설턴트) 이단비가 번역했는데, 한국 상황에서 이질감이 없었다. 한심하고 어리석고 속물적이고 무능하며 악의에 차 멀리하고 싶었던 인물들이, 다음 장면에선 귀엽고 사랑스럽고 연약하고 불쌍해 보여 결국 이해할 만한 인물로 여겨진다는 점은 작품의 신비다. 관객은 이 신비한 인물들을 연민할 수도, 조소할 수도 있다. <벚꽃동산>은 현실의 압축적 반영이기에, 연민과 조소는 결국 객석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송도영은 1막에서 탄식한다. “다 무너지고 있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송도영은 2막에서 만취한 채 안도한다. “살아 있는 거 그거 진짜 힘든 일이에요. 살아남는 건 기적이라구요.” 선대가 일군 기업은 팔리고, 아버지가 선물한 저택은 헐리고, 아름답던 벚나무도 베어진다. 이제 새 시대가 열린다. 송씨 남매는 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평생 안 타본 지하철을 타고, 1주일에 LP 2장 받으며 일하고, 친구들의 선의에 기대 살아가며 이를 기적이라 여길 것이다. 철없어 보이던 송씨 남매는 어느덧 회복탄력성 있는 낙관주의자가 됐다. 씁쓸함을 씁쓸함으로 끝내지 않고, 미세한 단맛을 내는 솜씨는 체호프, 사이먼 스톤, 배우들의 의지와 능력에 기인한다. <벚꽃동산>은 7월7일까지 공연한다.

연극 <벚꽃동산>에서는 송도영의 집 1, 2층과 옥상 공간이 고루 활용된다. LG아트센터 서울 제공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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