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법원, 군 가혹행위에 국가배상 인정
양심 가책 느낀 동기가 진정서 제보
게티이미지뱅크


"세월이 흐르고 자식을 키워보니 그 부모님의 사무치는 심정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2019년 10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진상위) 사무실에 한 통의 진정서가 도착했다. 자필로 눌러 쓴 편지엔, 35년 전 육군전투병과학교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의 진실이 들어 있었다. 제보자는 차마 진실을 털어놓지 못한 채, 동기 장교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오랫동안 숨기고 살아야 했다. 이 고뇌에 찬 편지를 실마리 삼아, 진상위는 당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은 1984년. 스물 셋 나이로 육군 학생군사교육단(ROTC) 장교로 임관한 최모 소위는 병과학교 입교 한 달 만인 4월 유격훈련 엿새 째 돌연 목숨을 잃었다. 군은 당시 최 소위가 54㎞ 행군 중 건강 상태가 악화된 점 등을 들어 "원인 미상의 탈진 및 과로로 쓰러져 병원 후송 도중 숨졌다"고 결론 내렸다.

부모는 건강했던 아들이 급사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진상을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군은 "학교장이 진급을 앞두고 있다"며 "조용히 넘어가 주면 최 소위 사망을 순직으로 인정하고 현충원에 안장해주겠다"고 회유했다. 설득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그의 부모는 수십 년간 아들 죽음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35년 뒤. 진상위에 도착한 편지에 드러난 '진짜 사인'은 '교관들의 가혹행위'였다. 훈련 첫 날 최 소위가 발목을 다쳐 구보에서 낙오하자 교관들은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진상위 조사에서 동기들의 증언이 터져나왔다. "목에 끈이 묶인 채 개처럼 끌려 다녔다" "오물통에 들어가게 했다" "추운 날씨에 개천을 기어 다녔다" "실신하면 나무에 거꾸로 매달고 코에 물을 부었다"는 가혹행위를 증언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구타에 최 소위가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한 적 있었다고 고백한 동기도 있었다.

교관들의 이런 구타·가혹행위의 배경에는 유격대장의 "더 세게 굴리라"라는 지시가 있었다. 문제를 제기했다가 불똥이 튈까 다른 교육생들이 입을 다물고 있던 사이 최 소위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고, 결국 훈련 6일 째 "시체 지나간다"는 교관들의 비웃음을 듣는 순간 혼절했다.

의식불명에 빠진 최 소위를 병원에 즉시 후송했다는 군 당국의 설명 역시 거짓이었다. 사건 당일 유격장에서 최 소위를 목격한 한 구대장(소대장)은 진상위에 "유격대장이 특별히 최 소위는 병원으로 데려가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때라도 병원에 이송했다면 사망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동기들도 "어떠한 구호 조치도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진상위는 당시 헌병대가 가혹행위 사실을 인지하고도 조작된 사인을 그대로 묵인하고 수사를 종결한 정황도 포착했다. 최 소위 죽음과 관련된 교관과 군의관들은 이후 징계나 처벌을 받기는커녕 각종 표창을 받거나 진급한 뒤 만기 전역한 것으로 확인됐다. 2년간의 조사 끝에 조사위는 "국방장관은 최 소위 사망 원인에 대한 군의 관련 기록을 변경하라"고 결정했다.

그렇게 이어진 국가배상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 이세라)는 지난달 31일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군 당국의 적극적인 은폐행위에 의해 37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진상을 파악할 수 있게 돼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결과가 초래됐다"며 "유족들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은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질책했다.

한국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7188 공항부터 슈퍼마켓까지…MS 오류에 ‘사이버 정전’ 랭크뉴스 2024.07.19
27187 '고문기술자' 이근안, 국가에 구상금 33억 물어내야 랭크뉴스 2024.07.19
27186 "방송4법, 의장 중재안 못 받겠다"‥국민의힘, 이틀 만에 '거부' 랭크뉴스 2024.07.19
27185 김용민 “골프 치러 군대갔나” 임성근 “체력 단력용” 랭크뉴스 2024.07.19
27184 '그림자 조세' 모든 부담금에 일몰시점 정한다 랭크뉴스 2024.07.19
27183 법원 “에버랜드, 셔틀버스 운전 하청노동자 직접고용해야” 랭크뉴스 2024.07.19
27182 채상병 사망 1주기‥광화문 추모 문화제 현장 연결 랭크뉴스 2024.07.19
27181 "복구에 안간힘"‥제방·둑 유실만 충남에서만 686건 랭크뉴스 2024.07.19
27180 “주말에 비행기 타야 하는데”…MS발 IT 장애로 여행객들 ‘안절부절’ 랭크뉴스 2024.07.19
27179 5만원짜리 '용두암 전복·소라'…조사 결과 더 충격적 진상 랭크뉴스 2024.07.19
27178 베트남 ‘권력서열 1위’ 응우옌푸쫑 공산당 서기장 별세 랭크뉴스 2024.07.19
27177 [속보] MS발 글로벌 IT 대란 원인 “업데이트 결함 탓” 랭크뉴스 2024.07.19
27176 [사설] 체코 원전 수주, ‘UAE 원전’ 전철 밟지 않아야 랭크뉴스 2024.07.19
27175 베트남 권력 서열 1위 응우옌 푸 쫑 서기장 별세 랭크뉴스 2024.07.19
27174 'IT 대란' 원인은 보안 패치…전세계 연결돼 인프라 먹통 랭크뉴스 2024.07.19
27173 베트남 ‘서열 1위’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 별세 랭크뉴스 2024.07.19
27172 국내도 'MS 대란'‥항공권 발권도, 온라인 게임도 '먹통' 랭크뉴스 2024.07.19
27171 ‘물벼락’ 장맛비 또…주말 수도권·중부 최대 150㎜ 랭크뉴스 2024.07.19
27170 IT 대란 전 세계 발칵…항공·금융·의료 줄줄이 마비 랭크뉴스 2024.07.19
27169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누구 넣고 빼라는 대통령실 지시 없었다” 랭크뉴스 202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