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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서울 을지로입구역과 종각역 사이에서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려 참가자들 사이로 대형 무지개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백소아 기자 [email protected]

“금융사에서 퀴퍼에 온 건 처음 봐요. 설계사님도 퀴어예요? 그럼 더 마음 편히 말할 수 있겠어요.” (퀴어퍼레이드 참가자)

지난 1일 서울 중구 을지로입구역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퀴퍼)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60여 곳의 성소수자 인권 단체, 동아리, 대사관 등이 부스를 차리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연대를 표현했다. 이 가운데 금융사로는 최초로 퀴퍼에 참여한 한 보험대리점이 참가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퀴퍼 참가자 약 3천명이 이 부스를 방문했다. “진정으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체계적이고 확실하게 자산 설계를 돕겠다”는 홍보 팸플릿이 이들을 맞이했다.

퀴어들에게 전문적인 보험 가입과 재무설계를 돕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이는 한 금융사 자회사형 법인보험대리점(GA)에서 일하는 대니(가명·35) 세일즈매니저와 시니(가명·33) 설계사다. 스스로 퀴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개발된 각종 금융 상품에 소외돼 있는 퀴어들과 자신이 가진 정보와 지식을 나누기로 결심했다. 대니는 “현재 금융 상품들은 대부분 집을 사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부부의 노후를 준비하는 ‘법률혼’의 생애주기에 맞춰져 있다. 금융사는 상품 개발을 포함해 모든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 고객들을 타게팅하지만, 그 예상 고객에 퀴어는 빠져있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지난달 31일 대니와 시니를 인터뷰했다. 퀴퍼가 끝난 뒤인 2~3일 서면으로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두 사람은 퀴어들이 금융을 가깝게 여기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고 한다. 고객 90% 이상이 퀴어라는 시니는 고객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시니는 “퀴어 입장에서는 ‘정상가족’을 전제한 채 이뤄지는 재무상담을 들으면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걸 말하려면 퀴어인 것을 오픈해야 하니 금융과 더 멀어져 버린다”며 “금융사들이 의도적으로 퀴어를 고객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객층 가운데 퀴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1일 서울에서 열린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재무설계 관련 부스를 차린 대니(가명·35) 세일즈매니저(왼쪽)와 시니(가명·33) 설계사가 지난달 31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주빈 기자

이들은 퀴어에게 필요한 금융은 따로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예를 들면, 퀴어 커플은 자녀가 없는 경우가 많아 사망보험금보다 연금 혜택이 요긴하고, 아우팅 등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잦은 편이어서 경제적 여건에 대한 불안감이 높다는 것이다. 또 가족·친지들과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도 많아 돌봄 공백에 대한 우려도 크다. 시니는 “동성 파트너를 수익자로 지정하고 공증을 받아 상속과 유사한 법적 효력을 발생하게 해주거나,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를 추천해 주는 식으로 퀴어들의 어려움을 함께 대비하곤 해요. 재무상담을 받은 퀴어 고객들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인생을 사는 느낌을 받는다’는 답을 들으면 정말 뿌듯해요”라고 말했다.

퀴퍼 준비는 걱정했던 것보다 순조로웠다고 한다. 이들은 먼저 법인보험대리점 상사들에게 퀴퍼에 부스를 설치하겠다는 기획안을 제출했다. 대니는 “이성애자들은 비혼을 선언하더라도 마음을 바꾸면 법적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퀴어들은 아직 그렇지 않다. 바꿔 말하면 이들이야말로 ‘확정적인 1인 가구’인 셈인데, 금융사로써 이들을 위한 플랜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퀴어를 본격적으로 타케팅한 금융 서비스를 제안한 셈이다. 이에 대한 상사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대니는 “대표님과 본부장님이 ‘성소수자를 고객으로 생각 못 했는데, 그들에게도 금융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말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니는 “개인은 물론이고 여러 기업과 단체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며 명함을 주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퀴퍼에 더 빨리 올 걸 그랬다”며 “퀴퍼가 끝난 뒤 일부 논란이 있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저희에게 호응해 주시는 분들의 반응을 보면서 큰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이들은 이번 퀴퍼의 행사 보험도 담당했다. 시니는 “주최 쪽이 행사 관련 보험에 가입할 때 내용을 상세히 적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더 편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퀴퍼 행사 보험은 우리가 맡기로 했다”며 “퀴어의 안전과 미래를 보장할 방법을 꾸준히 고민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사적 보험 없이도 퀴어들이 제도적인 보호망 안에 머물 수 있는 세상이다. 대니는 “가장 좋은 보험은 국민건강보험이다. 혈연관계에 묶이지 않은 동성 파트너도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시니도 “우리 같은 금융사가 퀴어를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제도적으로 동성 커플의 결합을 가능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라고 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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