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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기획] 우리 안의 세계화, 이주민
태아검사지 단어 어려워…병원 다녀도 불안 여전
임금체불 신고했지만 말 몰라 이길 소송도 질 뻔
지원사업 직접 수행한다던 정부, 어학 예산 줄여
지난달 21일 부산 이주민통번역센터 ‘링크’에서 만난 베트남 이주민 풍티투. 그는 “임신하기 전까진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으며 견뎠다”고 말했다. 고나린 기자.

“아파도 병원 안 갔어요. 그냥 약국 갔어요. 말 못해서.”

7년 전 한국에 온 베트남 이주민 풍티투(37)에게 병원의 기억을 묻자 ‘말에 얽힌 한’부터 이야기했다. 불가분이었다. 한국어가 낯설었다. 의료 용어는 특히 어려웠다. 증세를 설명하기 힘들어 심한 몸살을 종합감기약으로 버틴 적도 있다고 했다. 말하기가 두려워서 포기하고 고통을 견뎠다. 그런 풍티투에게도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 6년 전 첫째 아이를 임신했다.

빈혈이 있던 풍티투는 태아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했는데, 산부인과 병원을 다녀와도 안심할 수 없었다. 한국어로 가득한 ‘초음파검사 결과지’나 ‘기형아검사 결과지’를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기가 건강한지 아닌지 알 수 없었던 게 가장 힘들었다”며 “결국 한국말을 더 잘하는 베트남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원격 통역을 부탁했다”고 말했다.

병원 앞에서 풍티투에게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었다. 벽이고 공포였다. 지난달 21일 한겨레가 만난 이주민들에겐 흔한 경험이었다. 특히 의료나 법률처럼 기본적인 권리와 맞닿은 영역에서 언어의 벽은 그대로 인간적인 삶의 상실로 여겨졌다. 한겨레는 이주민의 읽고, 말할 권리가 제약된 현실에서 사회적 존재로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분투를 살펴봤다.

아파도 참았다…진단서를 이해할 수 없어서

병원에 얽힌 처참한 사연은 이주민과 지원단체들 사이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2019년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는 동네 병원에서 ‘급성맹장염’이니 큰 병원에 가라는 진료의뢰서를 받고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참다가 응급실에 실려갔다. 지난해 베트남 출신 50대 이주노동자는 급격히 체중이 빠지는데도 병원 방문을 꺼리다가 간경화증으로 돌연 사망했다고 한다.

아픔을 참는 배경에 ‘언어’가 있다.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이 실시한 2023 경기도 다문화가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결혼이민자·귀화자가 겪는 병의원 활용 어려움의 원인 1위는 ‘한국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32%)였다. 이 비율은 한국 체류 기간이 3년 미만인 경우 68.3%였는데, 10년 이상이어도 25.5%였다. 법무부 2022년 이민자체류실태및고용조사에서도 병원에 가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밝힌 이주민 응답자들은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서(33.7%)’를 최대 이유로 꼽았다.

단일 언어 전통이 강한 한국 사회라지만, 약간의 통역 지원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현재 둘째 아이를 임신한 풍티투는 첫째 때와 달리 부산 지역 인권단체 ‘링크’의 무료 통역 지원을 받아 격주로 산부인과 병원을 찾는다. 진료 당일 통역사가 병원 접수, 진료, 수납 과정에 동반해 소통을 돕는다. 풍티투는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을 그 자리에서 바로 이해할 수 있어서 많이 편하다”고 했다.

다만 정부의 통·번역 지원은 체계적이지 않고 불규칙하다. 링크의 경우 부산의 유일한 의료통역사 전문 양성 기관인데, 지난해부터 돌연 부산시 지원 예산이 끊겼다. 민간단체 대신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외국인주민지원센터’로 통·번역 예산을 이관한다는 취지다. 김나현 링크 센터장은 “부산 외국인주민지원센터는 통·번역이 주된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의료 통역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 통번역서비스를 이관할 거라면 링크가 하던 전문 교육 기능도 함께 가져갔어야 한다”며 “지속적인 지원을 위해선 전문가 양성 교육과 통번역 지원을 함께 수행할 컨트롤타워를 지자체에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억울한지도 몰랐다…판결문 읽을 수 없어서

법치국가에서 사회적 존재로 살아남기 위한 사법 영역에서도 언어의 벽은 견고하다. 한우 축사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썸낭(가명·26)이 25개월 법정에서 겪은 부조리는 그 단면이다. 썸낭은 고용노동청에 고용주의 임금체불을 신고하고 일터를 옮겼다가 2022년 3월 신고당한 고용주한테서 ‘보복 소송’을 당했다. 고용주는 썸낭의 사업장 무단이탈로 손해를 봤다며 숙박비, 사업손실금 등 5천만원을 요구하는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했다.

썸낭은 소송 내용도 이해하지 못한 채 1심에서 패소했다. ‘재산명시 명령’도 받았다. 이는 법원이 채무자에 재산목록 제출을 명하는 제도인데,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면 20일 이내의 감치에 처해진다. 썸낭은 감치 재판도 홀로 나갔다. “다음에 통역인을 구해 오겠다”고 말했지만, 한달 뒤 ‘구치소 감치 결정’이 내려졌다는 법원 집행장이 날아들었다. 뒤늦게 썸낭을 돕게 된 변호사가 법원에 항의한 뒤에야 감치 결정이 취소됐다. 대신 말해줄 사람, 변호사 도움을 받아 진행한 항소심은 지난 4월 썸낭의 승소로 끝났다.

법원은 법정 통·번역인 인증 제도를 2019년부터 시행해 전국 법원에 배정된 통역인은 5198명에 이른다. 다만 한겨레가 입수한 ‘법원별 통역인 후보자 현황’ 자료를 보면, 서울행정법원은 총 35개 언어 통역을 지원하는 반면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은 베트남어와 중국어 통역만 제공하는 등 지역별 편차가 크다. 충청북도는 관내 법원의 지원 가능 언어를 다 합쳐도 14개에 그친다. 썸낭 같은 캄보디아 이주민은 다른 지역에서 통역인을 찾아 일정을 맞춰야 한다.

특히 민사재판은 형사재판과 달리 통역인 선정이 법적 의무가 아니라 사각지대가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 썸낭을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민사재판은 통역비를 미리 납부해야 통역인을 신청할 수 있어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주민들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지인을 법정에 데리고 가기도 한다”며 “민사재판도 의무적으로 통역인이 선정되어야 하고 통역비를 예납하기 어려운 이들에 대한 소송 구조도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노동자 썸낭(가명)이 지난해 법원에서 받은 통역인 선정 관련 안내. 최정규 변호사 제공

사법 전반의 실무자 교육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지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는 “같은 법원이라도 외국인 전담 부서가 아닌 곳은 실무관들이 통역인 관련 업무를 놓치거나, 한국어를 조금 구사하는 듯한 이주민이라면 재판장이 그냥 재판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며 “법정통역인 교육도 중요하지만 수사기관 담당자, 법원 실무관, 판사의 사법 통역에 대한 이해를 키워야 제도가 잘 정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산 삭감 소동…한국어 교육 기회 줄어

통·번역 지원 공백에 더해 이주민이 한국어를 교육받을 기회조차 외려 줄어드는 모습이다. 정부 지원을 받는 민간 위탁 방식으로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어 교육 등을 맡았던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지원센터) 예산이 전액 삭감돼 올해 초 일제히 문을 닫았다. 정부가 이주노동자 지원 사업을 민간 위탁 방식이 아니라 ‘직접 수행’하겠다며 벌인 일이다. 하지만 예산은 지방자치단체에 배분됐고, 지자체는 이를 또다시 지원센터에 위탁했다. 결국 다시 문을 연 지원센터가 한국어 교육을 그대로 맡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한차례 소동을 거치며 예산만 대폭 줄었다.

비수도권의 한 지원센터도 예산 전액 삭감으로 문을 닫았다가 지난 3월 지자체 공모 사업에 선정돼 가까스로 다시 문을 열었다. 예산은 크게 줄어 상주 직원도, 한국어 수업 횟수도 절반으로 줄었다. 이 센터 관계자 ㄱ씨는 “수강 인원은 그대로인데 수업이 3개에서 2개로 줄었다. 25명 들어가던 교실에 40명씩 몰려서 지금 거의 ‘닭장’처럼 공부하고 있다”며 “한국어 수업을 늘리고 싶어도 예산상 그럴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역시 얼마 전 재개소한 인천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의 김재업 센터장도 “한국에 들어오는 이주민 자체도 늘었지만, 지난해 9월 법무부가 비전문취업 이주노동자에게 숙련기능인력(E-7-4) 비자를 받을 기회를 확대하면서 비자 전환에 필요한 한국어시험 점수를 올리려는 이주민이 많이 늘었다. 그러나 인천센터 역시 예산 삭감으로 상주 통역사가 6명에서 3명으로, 한국어 수업 반이 17개에서 14개로 줄어 교육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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