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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재성 | 논설위원

라인야후 사태가 한창이던 지난달 1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벤처·스타트업 투자서밋 2024’는 윤석열 정부의 정신분열증이 위중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확인해준 행사였다. 네이버가 십수년 동안 자본과 인력을 투자해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라인을 빼앗기게 생긴 마당에, 한국 정부가 돈(모태펀드)까지 보태가며 벤처기업의 일본 진출을 돕겠다니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애초에 윤 대통령이 일본 정부의 라인 강탈 시도에 맞서 싸우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윤 대통령처럼 경로의존성이 강한 사람은 사실에 생각을 맞추는 게 아니라 생각에 사실을 맞춘다. 자신이 공들여 키워온 일본과의 화해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 최대한 개입을 꺼릴 거라고 나는 예상했다. 결과적으로 예상은 더 나쁜 방향으로 빗나갔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렇게 납작 엎드릴 줄은 미처 몰랐다. 윤 대통령에게 라인야후 사태는 “한-일 외교 관계와 별개 사안”이어야 하고, “불필요한 현안이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 나가야”하는 하위 변수에 불과했다.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드러냈다.

강제동원 배상 문제부터 후쿠시마 오염수, 라인 강탈 시도를 관통하는 윤 대통령의 대일관은 ‘친일’이라는 오래된 용어 말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늘 일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일본에 유리하게 풀어간다. 많은 국민이 의아하게 여기는 지점이다. 그는 왜 국익 손실까지 감수하면서 일본에 저자세로 일관하는가.

고인이 된 윤 대통령의 아버지가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 1호여서 태생적으로 친일파였다는 식의 감성적 진단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까지 된 마당에 대일 외교라는 중대한 정책을 추진하려면 다수의 국민을 설득할 현실적 근거가 필요하다.

취임 초부터 윤 대통령이 내세웠던 대일 외교 정책의 명분은 ① 과거에 발목 잡혀 미래를 희생해선 안 된다는 실용적 접근, ② 일본이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체제라는 동일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라는 점, ③ 미국을 정점으로 한 안보협력체제 공고화, ④ 문재인 정부와의 차별화, 이렇게 네 가지였다.

라인 사태를 계기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용주의(①)와 이념주의(②)가 동시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과거사 문제와 수출규제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을 우리가 먼저 통 크게 양보하면 미래가 열릴 거라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일본은 자본주의 소유관계나 교역의 규범쯤은 능히 무시할 수 있는 나라였다. 무엇보다 일본은 자국보다 강한 나라엔 한없이 약하지만, 약한 나라엔 강한 ‘강약약강’의 세계관을 국가적으로 탑재한 나라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사실이다. 윤 대통령과 일부 보수세력만 몰랐거나 알면서도 무시했을 뿐이다. 윤 대통령이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인데, 먼저 숙이고 들어가면 호혜적으로 베풀 줄 알았던 모양이다. 강약약강과 강약약강이 만나 더 센 강약약강에게 당한 것이다. 전략적 사고가 가능한 유연한 사람이라면 방향을 바꿔 대응하겠지만,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이념적 근본주의자인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안보(③)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과 사이가 불편했던 문재인 정부 때보다 한반도를 둘러싼 객관적 정세는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윤 대통령이 일본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자 했던 이유는 이제 국내 정치적 목적(④)밖에 남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최대 실수는 국가 간 대결과 협력 사이에 ‘경쟁’이라는 제3의 강물이 흐른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일본의 라인 강탈 시도는 잃어버린 30년 동안 반도체와 정보기술(IT) 산업에서 한국에 추월당했던 일본이 뒤집기에 나선 큰 그림의 일부로 봐야 한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와 오픈에이아이, 구글과 오라클 등 빅테크들이 일본을 아시아 인공지능(AI) 산업 거점으로 삼겠다며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힌 상태다. 특히 샘 올트먼의 오픈에이아이는 일본에서 자체 반도체 설계·제조를 구상하는데, 투자 파트너가 라인야후의 공동 최대주주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미국 드라마 ‘동조자’에서 비밀경찰을 지휘하던 남베트남 장군은 사이공 함락 직전 이렇게 말한다. “미군은 철수 안 해. 키신저 장관이 확약했네. 말은 지키는 사람이야. 노벨상 수상자 아닌가.” 하지만 미군은 철수했고, 남베트남은 망했다. 오늘날 키신저는 이 말로 더 유명하다.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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