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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안판석 감독 신작 ‘졸업’

대치동 학원가 배경 일과 사랑
경쟁과 성공 이데올로기 속
배우는 과정의 교류·신실함 담아
티브이엔 제공

‘졸업’은 안판석 감독의 신작 드라마이다. 정려원·위하준이 주연을 맡고, 김종태·소주연·서정연 등이 조연을 맡았다. 표면적으로는 대치동 학원가를 배경으로 강사들의 일과 사랑을 그린 로맨스물이지만, 안판석 감독의 작품답게 계급적 욕망에 대한 비판적 도해가 수준급이다. 전작 ‘아줌마’ ‘아내의 자격’ ‘풍문으로 들었소’에 담겨 있던 중산층 풍자, 사교육, 계급 재생산 등의 문제의식이나,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보여주었던 연상 여성과의 사랑이 인장처럼 찍혀 있다.

사교육시켜 대기업 들여보냈더니…

이준호(위하준)는 고1 첫 모의고사에서 8등급을 받았으나, 과외교사 서혜진(정려원)을 만나 성적이 급상승해, 고려대학교 상경대에 입학했다. 이준호의 입시 성공담은 대치동에서 입소문을 탔다. 법대 휴학 중 과외를 시작했던 서혜진은 지금 유명 강사다. 학원의 1호 장학생이던 이준호는 대기업 정규직이 된 뒤로도 스승의 날마다 서혜진을 찾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강사 임용시험을 보러 온다.

입사한 지 3년도 안 된 대기업을 그만두고 학원 강사를 하겠다니, 부모 반대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준호의 결심도 확고하다. 아버지와 이준호의 대화가 일품이다. “아버지는 시대를 잘 타고나서, 우리 가족이 대치동 원주민으로 살 수 있었지만, 내 세대부터 회사원으로는 밀려나는 삶밖에 없다. 매달 수천만원이 꽂히는 통장과 신축 아파트 계약서를 보여주겠다. 아버지는 가져보지 못한”이란다. 아버지가 “얼마나 다녀보았다고?” 하고 반문하자, “얼마나 다닐 수 있을지 몰라서 그런다”고 답한다. “왜 지금이냐?”고 물으니, “고점에서 팔아야지. 더 지나면 몸값이 떨어진다”고 답한다.

아버지는 “천박하다”며 소리를 빽 질렀지만, 더는 논박하지 못한다. 사실 나무랄 수가 없다. 신자유주의적 직업관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준호는 아마도 대기업 정규직으로서 정해진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올릴 수 있는 노동소득과 그것을 모으고 대출을 지렛대 삼아 올릴 수 있는 자본소득 등을 모두 계산해보았을 때, 대치동 구축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한 가정의 삼남 중 둘째라는 자신의 지위가 결혼 뒤 어떻게 변화할지 계산이 나왔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돈이 될 만한 것을 활용해야 한다. 그도 말하지 않던가. 여기는 대한민국의 욕망이 성형외과와 입시학원의 이름으로 들끓는 강남이라고. 대치동 원주민인 그는 입시 성공담의 자본적 가치를 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도 안다.

이준호의 직업관은 아버지를 비롯한 구세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하지만 각 분야에서 엠제트(MZ) 세대들이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안정된 일자리로 선망되던 공무원·교사의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전문직에서도 판검사 임용보다 로펌 변호사가 선호되고, 대학병원 교수보다 미용 클리닉 원장이 선호된다. 아니 그 모든 전문직보다 유튜버나 투자자로 성공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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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과정에 감흥 있다면

티브이엔 제공

드라마는 사교육과 공교육의 갸우뚱한 관계를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서혜진은 내신 성적 올리기의 귀재이다. 학교별 출제 경향을 파악해 예상문제를 뽑고 문제 풀이 훈련을 시킨다. 새로 부임한 교사 표상섭(김송일)의 출제 문항에 복수정답 논란이 생기자, 서혜진이 학교로 찾아온다. 교사와 학원 강사가 서로에게 “기생충” “앵벌이” “인질” 운운하는 이 장면을 유심히 보라. 굉장한 진실을 폭로하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학생들을 공부시키는 곳은 학원이다. 학교에 남은 것은 시험 출제권, 성적 산출권, 학생부 작성권뿐이다. 교육자임을 자부하는 표상섭은 사교육의 영향력을 낮추고자, ‘교과서 내 출제와 서술형 문항 늘리기’를 선언한다. 그러나 변별력이 떨어지고 채점이 어렵다는 이유로 동료 교사들의 반발에 부딪힌다. 서혜진의 일갈처럼 표상섭은 ‘낡은’ 가치의 수호자처럼 보인다.

공교육 교사라는 자부심은 ‘최선국어’ 원장 최형선(서정연)에게도 있었다. 그는 20년 전 교사로 ‘압도적인 권위와 존경’을 받았으나, 더 이상 그럴 수 없음을 느꼈다. ‘무대를 바꿔’ 국어전문학원 원장으로 성공했다. ‘백발마녀’로 불리는 그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자아도취 된 듯 강의한다. 경쟁과 성공을 향한 그의 확신은 ‘대치동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서혜진은 스스로 스승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교사라는 자의식을 드러내는 표상섭·최형선 앞에선, 자신은 전공자가 아니라고 짧게 피력한다. 이준호에게 학원 강사 수입이 대기업 임원보다 많다고 자랑했다가, 이준호가 학원 강사를 하겠다니 말린다. 그에게 학원 강사라는 직업은 ‘좋아하지만, 남에게 권하고 싶진 않은 것’이다. 그는 애들에게 입시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엄청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준호에게 서혜진은 진짜 스승이었다.(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리고 과거 서혜진에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스승으로서의 초심이 있었다. 서혜진과 이준호가 동료 강사로 공동 강의를 하였을 때, 그 초심이 되살아난다. 처음 기획한 무료 강의에 온 학생이 이시우(차강윤) 한 명이었을 때, 포기하려던 서혜진은 “학생 한 명은 내 전문”이라며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예전에 이준호에게 과외를 했을 때처럼, 이시우에게 작품을 즐기고 음미하는 법을 알려준다. 이후 서혜진은 ‘최선국어’ 원장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무료 강의를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혼자 웅얼거린다. 이준호도 자신과 서혜진이 어떤 빛나는 감흥으로 맺어진 관계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첫 제자인 이시우에게 의대가 아닌 다른 진로를 찾아주겠다며 의욕을 다진다.

아무리 입시 공부라 해도, 내용이 문학이다 보면 그 속에는 ‘인간답게 사는 것’에 가까운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입시학원이라 해도, 신실하게 가르치고 배우는 와중에는 인간다운 무엇이 교류되기 마련이다. 드라마는 이 시대의 입시학원이야말로 신실한 가르침과 생활세계가 펼쳐진 공간임을 설득시킨다. 그것이 설득되기에 로맨스도 차분하게 감긴다. 그 결과 여선생과 남제자 사이의 로맨스가 별다른 금기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이준호는 서혜진을 인간으로 존경하고, 그에게서 내가 아는 세계를 배웠고, 그와 한 세계를 공유한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사랑은 흔한 이성애 역할극에서 남자가 여자를 대상화하는 감정과 매우 다르다. 더 많고 다양한 연상녀-연하남 로맨스가 필요하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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