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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존재감 인정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자연스러운 노년의 인정욕구 충족 위해선 새로운 경로 필요
좋아하는 일 찾아 경지 오르면 존재감 확인 ‘삶의 활력’ 느껴

아침에 일어나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리고 마당 안에 던져진 종이신문을 챙깁니다. 그리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합니다. 주로 시리얼이나 토스트에 과일주스, 요구르트지요.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밀린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를 돌린 뒤 마당의 화초를 정리하고 물을 듬뿍 주고 나서는 생체리듬에서 오는 소식에 답합니다. 그러다 보면 종종 아침에 온 전화를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뒤늦게 ‘부재중 전화’ 메시지를 보고 지방에 사는 동생뻘 후배에게 전화했습니다. “아침에 왜 이리 바쁜지 네 전화를 못 받았다,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녜요. 오라버니, 정말 잘 살고 계신 거예요!”라고 합니다. 잘 살고 있다는 말이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사회적으로 성취하고 인정받고 돈 버는 일은 안 하고 있으니까요. ‘두 발을 땅에 딛고 일상을 직접 꾸려나가는 것이 지금 이 나이에 잘 살고 있는 것’이라는 후배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곰삭는 성숙, 확장하는 성장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라는 연재 제목은 4년 전에 몸이 여기저기 아파서 할 수 없이 시작한 피티(PT) 코치에게서 들은 말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들어야 하는 운동기구의 무게를 조금씩 올리던 코치는 제가 미션을 달성할 때마다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회원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1년이 좀 넘은 어느 날엔 30여분 동안 비몽사몽 속에 시키는 대로 훈련을 했는데 코치가 “오늘 누적으로 1t을 들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식간에 피로가 다 풀리고 엔도르핀이 폭발적으로 분비돼 성취감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 약 3년 동안을 숄더 프레스, 바벨 스쾃 등을 번갈아 훈련하면서 근래에 데드리프트는 당일 누적으로 3t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시작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한 수준이지요. 지난주에는 코치에게 “이제 이 정도로 유지할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코치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아닙니다. 운동 처방에서 목표는 5t입니다. 물론 한 2년은 더 걸린다고 보고요.”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라고 반문하니 돌아온 답은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한편으로 기가 찼지만, 또 한편으론 ‘그래? 한번 해보지 뭐’라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은퇴하고 노화를 겪고 있는 내가 ‘성장’이란 말에 가슴이 뛰자, 문득 나는 왜 성장이라는 말에 관심을 갖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성장 강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나이가 돼서도 성장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반감도 들었습니다. 아마도 경제 개발이 곧 성장으로 여겨진 시대를 살아오면서 지켜본 많은 희생 영향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성장이라는 말보다 성숙이란 말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숙보다는 성장이라는 표현이 더 좋습니다. 생명체가 계속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성장이지요. 살아있음, 생명 활동이란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적 성장이 곧 성숙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저는 속으로 곰삭는 성숙보다는 여전히 깊어지고 넓어지는 역동성 그리고 확장성을 가진 성장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그 확장성은 지금의 나보다 안으로 더 넓어지고 밖으로 더 커지는 것이지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지요.

​나 자신은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생명체의 성장은 세포분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분열된 세포는 세포막이라는 경계를 통해 안과 밖이 연결되면서 함께 또 개별적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생기는 신체의 노화는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 즉, 세포가 분열할 수 있는 횟수가 제한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 중의 하나가 텔로미어(Telomere)가 닳는 데 있다고 합니다. 텔로미어는 세포의 디엔에이(DNA)를 보호하며 세포분열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데, 세포가 분열될 때마다 텔로미어는 조금씩 짧아져 세포분열이 둔화되면서 노화가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체적 노화는 생명체가 가진 본원적 특성이며 노인이 근력강화 운동을 하지 않으면 매년 4%씩 자연적으로 근 손실이 온다고 합니다. 근력강화 운동을 해야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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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텔로미어 강화하는 일

인간존재는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가지고 있는데 서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노화 속에서도 몸 상태가 좋으면 마음 상태를 좋게 만드는, 즉 내적 성장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노년의 성장이란 나의 생각 혹은 마음의 텔로미어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늙지만 낡지 않을 수 있으려면 마음의 성장, 내적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텔로미어가 닳아서 세포분열이 중단되고 몸이 노화하지만 어쩌면 정신의 텔로미어는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재생되고 영혼의 세포분열은 계속되는 것 아닐까, 이것이 노년의 성장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가톨릭 영성심리학자인 홍성남 신부를 만났습니다. 홍 신부는 인간은 어려서부터 젊어서나 늙어서나 인정욕구를 갖고 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데서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은퇴 후 노년에 잘 사는 방법은 직장 생활을 넘어서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해서 아주 잘하는 수준까지 만들어, 남들이 나를 찾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젊고 현직에 있을 때는 지위와 권력, 직위·직책에 의지해서 인정욕구가 해소됩니다. 그런데 은퇴와 노화의 시기로 접어들면 무엇에 기대어 남들의 인정을 얻을 것인지 생각해보면 나라는 존재 그 자체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나를 키워주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키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외적인 지위나 권력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힘을 찾아서 성장해야 하는 것이지요. 늙어서도 남의 인정을 바라는 마음은 유치한 게 아닙니다. 그걸 내려놓고 포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인정욕구를 충족시킬 새로운 경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 없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노년의 성장 공식인 듯합니다.

고교 동기인 한 친구는 평생을 직업 외교관으로 살았고 몇 나라에서 대사까지 지내고 은퇴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교 시절부터 관심이 있었던 중국어 공부를 은퇴 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해서 이제 9년째, 아주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습니다. 코로나로 몇년간 중국어 학원을 못 나가다가 작년부터 다시 나가기 시작했는데 고급반에는 학생이 대여섯명뿐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웬 노인이 와서 수업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업이 진행되면서 한시를 짓고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니 강사는 물론 40~50대 동료 학생들도 모두 인정하고 존경하는 태도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기분이 좋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남이 날 인정해준다고 이렇게 좋아하는 게 나이 들어서 좀 주책 아닌가, 유치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고 하길래 제가 홍 신부의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제 친구는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늙어서도 남이 알아주니 기분 좋아지는 자신의 마음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당연하고 건강한 것이라고, 오래된 친구가 알아주고 받아주고 인정해 주었다는 안도감이 그를 행복하게 해 준 것 같았습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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