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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어디로 갔을까. 1호선, 2호선, 3호선 … . 숨바꼭질하다가 영영 숨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엇갈려 마주치지 못한 것일까.
지하철 이동상인 김모(76)씨가 지난 5월 27일 파란 통이 달린 카트를 끌고 자신이 방금 내린 열차를 쳐다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봇짐장수(褓商·보상)와 등짐장수(負商·부상)를 아울러 일컫는 보부상. 50년 전인 1974년 8월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하면서 이들 일부는 ‘지하의 세계‘로 들어섰다. 보부상의 현대 버전, 우리는 공식적으로 ‘지하철 이동상인’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보부상의 후예’라고도 하는 이들도 있다. ‘잡상인’이라고도 하지만, 비하와 부정적 어감이 강하다며 2012년 서울시에서 퇴출한 용어다. “요즘 통 못 봤어요”라고 서울 지하철 3호선 승객 김수녕(39·경기도 고양)씨를 비롯한 여러 시민이 말했다. 이들은 사라지고 있을까.

지난 3월 4일부터 지난달 27일까지 열다섯 차례 접촉을 시도했다. 만난 이동상인은 단 두 명. 인터뷰에 손사래를 치던 이들과 간신히 지하철 벤치에 앉았다. 이름도, 어느 호선 어떤 역에서 만났는지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조건이었다. 김모(76)씨는 파란 상자의 카트를 끄는 ‘시그니처 스타일’이었고, 이모(63)씨는 멜빵이 어깨에서 허리로 흐르는 크로스백을 멘 ‘뉴노멀 스타일’이었다. 이 ‘보부상의 후예’들은 “끝났어요, 끝났어”라는 말부터 시작했다. 이들과는 각각 다른 곳에서 만났고, 중복되는 답변은 별도로 표시하지 않았다.

A :
뭐가 끝났다는 말인가요.
Q : 진즉부터 장사가 안됐어요. 하루에 3만원 벌기도 힘들어요. 이 벌이도 끝났다는 거예요.


Q : 진즉이라뇨.

A :
(김씨) 4년 전쯤부터죠. 단속에, 코로나19에, 저가 매장에 …. 빨리 다른 일로 갈아탔어야 했는데 뾰족한 게 없어요. 행상(이동상인)만 해 와서.
A :
(이씨) 저보다 젊은 사람들은 배달로, (나이) 많은 사람은 경비로 빠졌어요.
이들이 말한 4년 전인 2000년. 지하철(서울 1~8호선) 이동상인 단속은 1만1683건이었다. 바로 1년 전인 2019년 2만3849건의 50%도 안 된다. 이후 2021년은 다시 2020년의 절반 수준인 5870건, 2022·2023년은 또 2021년의 절반가량인 2500~2800여 건으로 줄었다. 4년 새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승객이 감소(2019년 대비 2021년 약 -25%)하고 장애인단체 시위로 단속 인력이 그쪽으로 빠진 이유도 있지만 그건 미미하다”라며 “단속 건수가 줄어든 건 이동상인 수 자체가 급감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Q : 이동상인이 얼마나 줄었습니까.

A :
(김씨) 우리 라인 사람은 2019년만 해도 40~50명이었는데, 지금은 5~6명만 활동하고 있어요.
서울교통공사가 밝힌 ‘단속 건수 4년 새 10분의 1로 감소’와 맞닿는 수치다. ‘라인’은 이동상인별로 활동하는 구간을 말한다. 라인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게 ‘룰’이다. ‘굴 밖(지상구간)’ 상인들은 ‘굴 안(지하 구간)’에 들어가지 않는다. 김씨와 이씨는 “어느 라인에서 일하는지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Q : 보니까 열차 시간을 정확히 알고, 조금의 틈도 없이 반대 방향의 노선으로 갈아타더군요.

A :
타이밍이 중요하죠. 중앙 승강장이 아니면 계단을 타고 넘어가야 하니까 걸음 수까지 셉니다. 제품 설명 시간도 짧고 강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구간이 너무 짧으면 아예 장사를 안 합니다. 3호선 강남 쪽의 경우죠.
이동상인이 가장 많이 활동하는 지하철 2호선의 주요 역간 소요 시간은 1분~2분 30초. 최장 2분 30초 동안 금전 거래와 이동까지 해결해야 하니 이들의 PT(프레젠테이션)는 짧고 강렬해야 한다.
지하철 이동상인은 역과 역 사이의 시간을 고려해 짧고 강한 상품 프레젠테이션(PT)를 한다. 김홍준 기자

라텍스 고무장갑을 파는 김씨의 PT는 이렇게 이어진다. ①의례(편안한 여행길에 양해 말씀드립니다) ②희소식 전달(오늘 좋은 물건 있습니다). ③ 이슈 제기(요새 고물가로 고생하시지요) ④기존 방식의 한계 비판(일반 고무장갑보다 수명이 깁니다) ⑤대안의 한계도 쟁점화(그렇다고 비싸게 받지도 않습니다) ⑥상품의 특수성 강조(탄력이 좋습니다. 이렇게, 미국 NASA까지 늘려도 되돌아옵니다) ⑦불가사의한 가격 강조하며 마무리(1켤레 2000원이지만 3켤레는 5000원, 특별가로 모십니다)한다. 일각에서 지하철 이동상인을 “PT의 달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동상인은 보통 오전 10시에 출근, 오후 4시에 퇴근해 왔다. 직장인 출퇴근 시간과 겹치지 않기 위함이다. 하지만 김씨와 이씨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장사가 안되면서 오후 근무는 접는 상인들이 많단다. 기자가 이동상인을 만나지 못한 이유다.


Q : 장사가 어느 정도 안 됩니까.

A :
5년 전만 해도 열심히 뛰면 하루 20만원은 벌었어요. 지금은 3만원 정도입니다. 웬만한 물건은 사람들이 안 사요.
Q : 왜 장사가 안됩니까.

A :
단속 강화와 온라인 쇼핑이 커요. 거기에 저가 오프라인 상점인 다이소와 겹치는 상품이 많고요. 젊을수록 현금을 갖고 다니지도 않아요. 그나마 어르신 손님이 많은 것도 그 이유입니다.
김영옥 기자

이동상인이 10분 1 수준으로 줄어, 단속 건수도 10분의 1로 줄어든 2019년~2023년 사이, 온라인 쇼핑몰 매출은 136조6008억원에서 228조8607억원으로 168% 늘었다. 다이소 매출도 같은 기간 2조2362억원에서 3조4604억원으로 154% 늘었다. 물론 기업과 이동상인에 대한 구매력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동상인의 상품은 더는 매력적이지 않게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Q : 오후 장사는 안 한다고 했습니다.

A :
네. 오후에는 이미 전철 승객 대부분이 무슨 일인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중에는 온·오프라인에서 뭔가를 산 분도 많을 테고요. 소비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된 시간입니다. 시끄럽게 (장사하고), 구태여 (살 필요 없으며), 거추장스럽게 (사봤자 짐만 될 것)…이런 이미지가 됐지요.
매출 50% 정도를 총판(물건을 대주는 곳)에 납입하는 ‘회원제’ 김씨와 달리 이씨는 혼자서 물건을 들여와 판다. 이른바 ‘독고(獨孤)’라고 부르는 형태다. 그는 이어폰이나 초소형 장난감 등 아담 사이즈를 선호한다고 했다.


Q : 가만히 있으면 이동상인인 줄 모르겠는데요.

A :
(이씨) 예전처럼 캐리어나 카트에 담아서 팔지 않아요. 이제 물건은 작아야 해요. 수십 개를 이런 크로스백에 넣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값은 또 5000원이 정도로 얼마큼 나가야 해서, 부가가치가 있는 것이라 하지요. 숨기기 편해야 해요. 지하철보안관의 현장 단속에 걸리면 안 되잖아요.
Q : 현장 단속도 있지만, 승객 민원으로 단속도 되나요.

A :
가끔 있습니다. 사진 찍고 동영상 촬영을 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신고 문자도 보내요. ‘3호선 오금 방향 원당역과 원흥역 사이, 1234호 객차’ 이런 식으로요. 그러면 다음 역에서 지하철보안관이 탑승하는 거죠. 그래서 승객이 뜸한 시각과 구간에서 벌이를 합니다.
지하철 이동상인의 상품 보관함 안에는 목청을 가라앉혀 줄 물도 한 통 놓여 있었다. 김홍준 기자

Q : 단속이 이동상인 감소에 가장 큰 영향이라고 말했지요.

A :
법상으로 저희는 ‘승객에게 위해를 끼치는 행위(철도안전법 제47조제7호)’를 하는 사람입니다. 철도안전법 시행규칙(제82조)에는 5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게 돼 있어요(2020년 신설). 경범죄로 처리돼도 과태료 5만원입니다. 전에는 하루 벌어 과태료를 내고도 남았지만, 이젠 과태료 한 번 맞으면 하루 벌이 이상을 내야 해요.
Q : 그런데도 왜 계속합니까.

A :
가게를 낼 형편이 안 됩니다.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고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떠났고요. 우리도 언젠가는 다 사라질 겁니다.
김씨는 지하철 이동상인 경력 40년이 다 된다고 했다. 그는 “1988년쯤이 최대 호황이었지요”라며 말을 이었다. 당시는 지하철 3·4호선 완공 직후다. 서울연구원에서 표현한 ‘지하철 시대’였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지하철 이동상인은 저개발국가가 기술집약적 인프라를 토대로 압축 성장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비정규’ 직업”이라며 “인프라는 어느 정도 갖췄지만 소소한 생필품이 모자랐던 시대, 지하철 이동상인의 등장은 이들보다 몇 년 앞선 ‘화장품 출장 여사님’ ‘미제 아줌마’만큼이나 획기적이었다”고 진단했다.
지하철 이동상인이 상품이 담긴 여행 캐리어를 놓고 프레젠테이션(PT)를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하지만 기술의 덕을 본 이들은 다른 기술에 밀려나고 있다. 시공기술로 만든 ‘사업장 지하철’에 편승해 왔던 이동상인은 정보기술(IT)에 밀려나고 있는 것. 하 평론가는 “모바일 결제와 온라인 쇼핑이라는 파고가 이동상인을 덮쳤다”며 “보다 고도화된 사회로 접어들면서 시민은 공공질서가 권리라고 여기게 됐고, (신고) 메시지라는 기술을 통해 그 권리를 행사하면서 지하철 이동상인은 시대의 한 풍경으로 남을 것”이라고 봤다.

시민 반응은 갈린다.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도록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다(경기도 고양시 37세 김영석씨, 서울 영등포구 48세 인모씨)”와 “그래도 살아보려고 장사하는데 승객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놔둬도 괜찮지 않나(경기도 성남시 53세 임동균씨, 서울 동대문구 41세 황모씨)”는 의견이다.

지하철 이동상인을 20여년간 ‘주의 깊게’ 지켜본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지하철 이동상인은 사라질 순 없다. 수가 적어질지언정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보부상의 후예, PT의 달인, 안전 위해자, 시대의 한 풍경…. 많은 ‘닉(닉네임)’을 갖게 된 지하철 이동상인 김씨와 이씨는 오늘도 ‘×호선 ××행 ××역과 ××역 사이, ××××번 열차’에 탈 것이다.

“편안한 여행길에 양해 말씀드립니다. 오늘 좋은 물건 있습니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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