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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1.3조 재산분할'이 남긴 불씨]
30년 동안 숨겨져 있던 약속어음이 핵심
재판부 "노태우 → 최종현으로 돈 흘러가"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나란히 출석한 최태원(왼쪽 사진)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연합뉴스


1조3,808억 원. 사상 최고의 재산분할액 선고가 나온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항소심 최대 쟁점은 '노태우 비자금 300억 원'의 실체였다. 재판부는 노 관장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돈이 최종현 선대회장을 통해 SK그룹(당시 선경)으로 유입된 점을 사실상 인정했다. 30년 동안 존재 자체가 꽁꽁 숨겨져 있던 이 돈을 두고, 재판부는 "일찍 알려졌더라면 국가의 (추징금) 추심 소송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300억 원은 '당시 기준'으로 보아 불법적인 재산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단서를 달았다.

30년 만에 드러난 '약속어음'

노태우 전 대통령 딸인 노소영(오른쪽)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과거 행사에 함께 나왔을 당시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31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 김시철)는 노 전 대통령(2021년 별세)이 최 회장 부친인 최종현 전 회장(1998년 별세)에게 1991년 300억 원 상당의 금전적 지원을 했단 사실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 부인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 오던 약속어음 6장(이 중 2장은 2012년 SK그룹에 교부)을 근거로 이런 판단을 했는데, 노 전 대통령 측에서 돈을 넘겨줄 당시 SK 측으로부터 약속어음을 받았다고 본 것이다.

이 약속어음의 존재는 이번 이혼 재판에서 처음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과 김 여사는 대통령 재임 기간을 전후로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최소 수백억 원(김옥숙 메모 기준 666억 원)의 돈을 보관하도록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건넨 돈의 존재는 노 전 대통령 수사·재판이나 추징금 납부 과정 등에서 대부분 확인됐지만, 김 여사는 딸(노 관장)의 이혼소송 2심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에 이를 법정 증거로 세상에 처음 내놓았다.

양측은 재판 과정에서 '어음'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다. 노 관장 측은 '아버지 돈이 넘어간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 비자금은 선경그룹이 1992년 태평양증권(현 SK증권)을 인수하고,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는 등 SK그룹 확장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최 회장 측은 돈 받은 증거가 아니라 퇴임 후 대통령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위한 증표'라고 반박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이후 활동비 등을 요구하는 경우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의미"라는 취지다.

"사돈끼리 이러지 맙시다" 30억 거절도 근거

노태우(왼쪽) 전 대통령이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판부는 △김 여사의 메모(1998년 4월과 1999년 2월 작성) △이미 수천억 원 비자금을 조성했던 노 전 대통령이 SK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상황 △노 전 대통령과 최 전 회장 간에 오갔던 대화 등을 근거로 약속어음의 존재를 인정했다. 김 여사 메모에는 노재우(노태우 동생)씨에게 120억 원, 신명수(사돈) 신동방그룹 회장에게 230억 원 등을 제공한 사실이 적혀 있는데, 이 액수는 수사와 재판에서 인정된 것들이라 메모의 신빙성이 높아졌다. 김 여사는 해당 메모에 '선경 300억 원'이라 적었고, 약속어음은 '선경 300'이라 적은 봉투에 보관해 왔다.

1988년 말 최 전 회장이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30억 원을 주려고 했다가, 노 전 대통령이 "사돈끼리 왜 이러시냐"며 거절한 사건(노 전 대통령 형사사건 조서에 적시) 역시 근거가 됐다. 그런 상황이 있었음에도 1992년 갑자기 노 전 대통령에게 300억 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당시는 노 전 대통령이 이미 기업가, 친인척, 금융기관 등에 비자금을 맡겼던 상황이라 퇴임 후 사돈에게까지 손을 벌려 따로 활동비를 조성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도 참작했다.

재판부는 "노 관장 측이 갑자기 약속어음의 존재를 들고 나와 신빙성이 없다"는 최 회장 측 주장도 물리쳤다. 어음이 공개될 시 도덕적 비난, 기업 활동의 어려움, 추징의 위험성, 소송 전까지 유지되던 두 사람의 혼인관계, 대외적으로 약속어음이 공개될 경우 혼인관계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문제라는 점 등을 고려해 본다면 공개를 늦춘 것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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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3111450004805)

"300억원 불법원인급여는 아냐"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자금 300억 원의 존재 자체는 향후에도 논란의 불씨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돈의 성격이나 출처 등을 명확히 밝히진 않았다. 다만 "노 전 대통령 측이 최 전 회장으로부터 교부받은 약속어음 및 보관 경위가 대외적으로 공개됐다면, 대한민국이 최 전 회장을 상대로도 추심 소송을 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며 여지를 남겼다.

동시에 이 돈이 불법원인급여(불법한 원인에 의해 행해진 급부)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이 불법 비자금 300억을 맡겼다는 주장을 인정해 재산 기여도를 인정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이 반사회 범죄로 얻은 수익을 노 관장이 찾아가는 것을 용인하는 결과"라고 주장해왔는데, 이를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설령 소송 전 돈의 존재가 밝혀졌더라도 1991년 최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은 것 자체를 불법원인급여로 보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200억 원을 숨기려고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에게 빌려준 것을 '사회질서에 반하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대법원 판례를 함께 근거로 들었다.

최 회장은 과거 노 관장을 향한 편지에 "재산도 쓸데없이 많아봐야 문제만 더 생기고, 욕심만 생겨 '걱정덩어리'만 된다"고 적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경유착으로 형성된 비자금이 국내 굴지 대기업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 '세기의 이혼' 사건은 이제 대법원의 판단만 남아 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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