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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국회가 문을 연 30일 새 주인을 맞이한 국회 의원회관 건물 지하에선 쓰레기 대란이 벌어졌다. 이날 오전 10시 지하 5층으로 내려가자 주차장 한쪽에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버린 폐지와 각종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21대 국회를 떠난 148명의 의원과 22대 때 사무실을 옮긴 의원들이 버린 폐기물이었다. 국회도서관과 의정관, 본청 등에서 파견 나온 국회 미화원들이 총출동해 의원실에서 버린 폐지와 쓰레기를 카트에 잔뜩 담아 옮기며 분주한 모습이었다.
30일 국회의원회관 쓰레기 수집장에 버려진 세미나 참석자들의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 이름과 소속, 연락처가 담긴 서류가 파쇄 없이 버려져있다. 이창훈 기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려진 폐지 더미를 들춰보니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 뭉치가 무더기로 나왔다. 특히, 주민등록등본과 납세 이력 등 내밀한 개인정보가 담긴 국회 인사청문회 자료도 손쉽게 발견됐다. 한 국민의힘 의원실에서 버린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인사청문회 관련 파일철엔 박 전 장관의 금융거래 내역, 남편의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해당 의원실 직원은 “담당하던 직원이 의원실을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로 버린 것 같다”며 당황해했다.

또 다른 의원실은 토론회 참석자의 이름과 소속, 연락처를 적은 문서 10여장을 파쇄하지 않고 버렸다. 가족 관계와 개인 연락처가 적힌 신원진술서도 그대로 쓰레기장으로 흘러들어왔다. 개인정보보호법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타인이 개인정보를 유출할 경우 손해배상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만일 당사자가 알았다면 소송감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자료인 셈이다. 국회의원의 개인정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돈봉투 사건으로 구속 중인 무소속 윤관석 전 의원의 국회도서관 평생 열람증 발급 신청서엔 집 주소와 주민등록번호가 선명했다.

기자가 “주민등록번호가 다 나온 자료들인데 이렇게 버려도 되냐”고 묻자 쓰레기를 치우던 미화원은 “그런 거 볼 시간이 어딨냐. 버리기도 바쁘다”며 고개를 저었다. 또 다른 미화원은 “무거워서 옮기던 수레의 바퀴가 터졌다”며 “쓰레기양이 4년 전보다 훨씬 늘어난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국회의원실에서 폐기한 각종 문서와 책자들이 30일 국회의원회관 지하주차장에서 트럭에 담겨있다. 이창훈 기자

상임위 활동의 흔적이 담긴 자료도 잔뜩이었다. 대부분 낙선한 의원실이었다. 새만금개발청이 제출한 2023년 사업설명자료 책자는 띠지가 묶인 그대로 폐기됐다. 국민의힘 이용 전 의원이 낸 자서전 500여권은 빳빳한 새 책 상태였다. 검찰청과 경찰청 등 수사기관에서 받은 보고 자료와 국가 안보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국방위 소속 의원실의 자료도 수두룩했다.

국회 주인이 4년마다 바뀔 때가 되면 개인정보와 민감한 의정자료의 허술한 폐기는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국회사무처와 의원실 모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회사무처는 4·10 총선 이후 “개인정보와 대외비 등 민감한 내용을 담은 문서는 파쇄를 당부한다”며 수차례 공지를 했다. 하지만 의원회관 지하 1층에 있는 대형 세단기는 의원회관 이사가 한창인 이날 오전 이용자가 적어 한산했다.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날인 29일 국회의원회관의 한 사무실 앞에 놓여진 각종 서류와 사무집기들. 이창훈 기자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비문의 경우 직접 관리하지만, 그 외의 문서까지 일일이 확인해서 파기하긴 어렵다”며 “업체에서 수거한 폐지는 당일 파쇄하는 걸 원칙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낙선으로 의원실을 옮긴 한 직원은 “일정에 쫓겨 사무실을 비워줘야 하다 보니 문서 하나하나 살피면서 파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21대 국회는 임기 종료 하루를 앞둔 지난 28일 본회의를 열어 채상병 특검법 재의결 표결을 하는 등 이사할 시간이 더더욱 부족했다.

4년 뒤엔 이런 풍경이 사라질 수 있을까. 행정부에 국가기록원이 있듯이 입법부엔 국회기록보존소가 있다. 국회에서 생산되는 각종 문서를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의원실에서 만든 자료는 보존 의무 대상이 아니라 의원실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임기를 마친 296명의 21대 의원 중 36명만이 기록 이관에 동의한 것만 봐도 여전히 보안 의식이 부족한 걸 알 수 있다.

21대 국회는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을 얻었다. 막판까지도 강행 처리와 거부권 행사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의원회관 지하 5층의 풍경은 이런 21대 국회의 깔끔하지 못한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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