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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열린 스물다섯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자 발언에 박수를 치고 있다. 민생토론회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이 민심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대통령실 제공


임기 중반을 지나 정치적 위기가 깊어지면 대통령실 참모들이 항상 하는 얘기가 있다. “대통령은 잠깐의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고 역사와 대화하며 중요한 레거시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임기 2년을 지난 윤 대통령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윤석열-이재명 회담을 중재한 것으로 알려진 함성득 교수는 “윤 대통령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통령들과 ‘역사적 산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과거 청와대의 대통령 관저는 숲속 절간처럼 적막하고 고요해서 ‘마주할 게 역사밖엔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권력의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청와대를 나왔다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듣기보다 역사적 산책에 집중하는 건 웬일인지 알 수가 없다.

역사를 마주하는 게 의미 있으려면 정확한 현실 판단을 전제해야 한다. 과거 여러 대통령이 역사와의 대화를 말하면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건, 위기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탓이 크다. 지금 윤 대통령에겐 실현 가능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당면 과제를 깨닫는 게 더 중요하다. 이걸 오판하는 순간 대통령의 역사적 산책은 가시밭길로 변할 수 있다.

새 국회가 문 열기도 전에 개헌 주장이 쏟아지는 건 의미심장하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가장 먼저 ‘대통령 중임제 개헌으로 제7공화국의 문을 열자’고 제안했다. 우원식 차기 국회의장은 22대 국회 개원 직후 헌법개정특위를 설치해 신속하게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나경원 국민의힘 국회의원 당선자도 ‘대통령 임기 단축을 포함한 개헌 논의의 모든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87년 체제’의 핵심인 현행 헌법은 시대적 소명을 다했기에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진작부터 있었다.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4년 중임제’ 원 포인트 개헌을 공개 제안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하지만 진전은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2년은 역설적으로 87년 헌법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지닌 ‘책임지지 않는 국정운영’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대통령에 오르고, 5년 뒤엔 아무런 평가 없이 퇴임해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87년 헌법에 ‘5년 단임’을 정할 때만 해도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장기 집권 가능성의 배제였다. ‘3김씨가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하려 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다수의 지지를 받은 건, 그때의 시대적 과제가 ‘독재를 막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세대가 흐른 지금, 대한민국이 마주한 정치적 과제는 달라졌다. 37년 전엔 ‘독재를 막는 헌법’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국정운영 성공을 위한 헌법’을 만드는 게 훨씬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됐다. 보수 진영에서도 ‘윤 대통령 임기 단축’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건, 앞으로 3년을 이대로 흘려보내선 국가의 미래뿐 아니라 보수 정치세력의 부활에도 위험천만이란 인식이 확산한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문제를 개선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합의를 이루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각제도 있지만, 다수 국민이 찬성하는 ‘대통령 4년 중임제’가 좀 더 현실성 있는 대안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제도에선 연임하지 못하면 ‘실패한 대통령’, 연임하면 ‘성공한 대통령’이란 객관적 평가가 가능해진다. 임기 초부터 훨씬 책임 있는 자세로 국정운영에 나설 수 있다. 연임하면 8년간 국정운영을 이어갈 수 있으니 연금개혁, 저출산·고령화, 기후·에너지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도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다.

시간은 많지 않다.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하면 개헌하겠다. 임기 단축도 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면, 개헌 추진뿐 아니라 원활한 국정운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경제·기본권·검찰·영토 조항 등의 쟁점이 너무 많아 합의가 쉽지 않다면, ‘순차 개헌’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 이번엔 권력구조와 5·18의 헌법 전문 삽입 등만 다루고, 다른 쟁점은 합의가 이뤄지는 대로 차례로 고쳐나가면 된다. 선거와 국민투표를 함께 하면, 개헌의 행정·재정 부담을 한결 줄일 수 있다. 헌법재판소가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면서 수백년 내려온 ‘관습 헌법’을 내세운 적이 있는데,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 헌법을 자주 고치는 건 문제를 그냥 묵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국정운영 결과에 책임지지 않고 오직 당선이 목표인 대통령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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