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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여주에 있는 한 농장의 기숙사. 사업주가 제공한 비닐하우스 안 조립식 패널 가설건축물 숙소에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제공

방글라데시인 아자드(가명·24)는 경기도의 한 제조업체에서 일한다. 고용계약을 할 때 사업주는 기숙사를 ‘오피스텔’이라고 했지만, 실제론 조립식 패널로 엮은 가설건축물이었다. 등록은 당연히 안 돼 있었다. 그런데도 사업주는 숙식비라며 매달 15만원을 월급에서 공제했다. 충남의 한 상추 농장에서 일하는 20대 캄보디아인 스롱(가명)도 농장 옆 컨테이너에서 산다. 스롱은 컨테이너를 “기숙사”라고 부른다. 농장에서 일하는 20명 넘는 노동자가 ‘기숙사’ 여러곳에 흩어져 산다. 기숙사는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춥다. 내부에 화장실이 있지만, 성인 여성 4 ∼5명이 공유하려니 그 어려움은 말로 다 못한다.

포천 캄보디아 노동자 사망, 그 후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의 한 농장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속헹(당시 31살)이 숨진 채 발견된 건 2020년 12월20일이다. 그는 비닐하우스 안 조립식 건물에서 다른 노동자 5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날 일동면의 기온은 영하 16.1도까지 떨어졌다. 한파 경보가 내려진 날 속헹은 난방기가 고장 난 숙소에서 피를 토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한국에 온 지 4년8개월, 귀국을 3주 앞둔 날이었다.

속헹이 한파 속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관련 대책을 내놨다. 고용노동부는 속헹의 사망일로부터 보름도 더 지난 2021년 1월6일 가설건축물을 숙소로 제공하는 사업주에게는 외국인노동자 고용을 허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예외조항이 있었다. 사업주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이주노동자 ‘가설건축물 축조신고필증’을 받으면 가설건축물을 숙소로 써도 고용허가를 받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들은 이 예외조항 때문에 ‘비닐하우스(가설건축물) 숙소’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건축법상 축조신고필증은 대지 위치, 건축면적, 존치 기간 등을 적은 신고서와 배치도·평면도 등의 서류를 지자체에 제출하면 되는데, 몇가지 요건만 갖추면 발급받을 수 있다. 실제 국토교통부의 ‘임시숙소 용도 가설건축물 처리 현황’을 보면, 2021년부터 3년 동안 전국 17개 지자체에 접수된 ‘가설건축물 외국인 임시숙소 또는 외국인노동자 숙소 사용 신고’ 82건이 모두 수리됐다.

고용노동부가 2020년 8월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7천여명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한 결과 99.1%가 사업주가 제공하는 숙소를 이용했고, 그중 74%가 컨테이너·비닐하우스 등 가설건축물에서 살았다. 지난해 10월부터 농업 사업자 4600명을 상대로 진행한 고용노동부 실태 조사 결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파주노동희망센터가 지난해 파주 지역 이주노동자 142명을 대상으로 벌인 주거 실태 조사를 보면, 사업주가 제공한 숙소 거주자(61명) 가운데 30.3%가 여전히 가설건축물에 살고 있다.

경기도의 한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인 아자드(가명)가 사는 공장 안 숙소 모습. 사업주는 아자드와 고용계약을 할 때 기숙사를 ‘오피스텔’이라고 했지만, 실제론 공장 안에 있는 조립식 패널 가설건축물이었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제공

빈번하게 무시되는 이주노동자 방어권

현행법상 가설건축물은 신고필증이 있어도 임시숙소로만 이용할 수 있고, 노동자의 상시숙소로 쓸 수 없다. 하지만 스롱의 경우처럼 컨테이너나 조립식 패널, 비닐하우스 등을 기숙사로 쓰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속헹 사망사건 뒤 고용노동부는 불법 가설건축물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가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면 고용주의 동의 없이도 이직할 수 있게 했지만, 고용노용부가 실제로 이를 허락한 사례는 2021년 40건, 2022년 44건, 2023년 31건에 그쳤다. 경기 광주의 한 공업사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인 아슬람(가명·34)은 사업주가 공장 안 컨테이너를 기숙사로 제공한 것을 이유로 고용노동부에 사업장 변경을 요청했으나 자자체에 임시숙소로 신고가 돼 있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사업주가 숙소를 제공하며 급여에서 숙식비를 미리 공제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근로기준법상 임금 전액 지급 원칙을 준수할 수 있도록 숙식비 선공제를 법령으로 금지하고 관련 업무지침을 폐지하라”고 고용노동부에 권고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내·외국인 간 법 적용의 일관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며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우다야 라이 위원장은 “비 새는 지저분한 가설건물에 5∼6명씩 살게 하면서 숙식비를 받는 사업장이 여전히 많다”며 “고용노동부에 숙식비 지침을 없애달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머릿수대로 받던 숙식비를 숙소당 얼마로 받으라는 식으로 바뀌었을 뿐 지침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다.

변화도 있었다. 이주노동자 숙소 관련 정부 지침이 강화된 뒤 일부 사업주는 가설건축물이 아닌 원룸·빌라·아파트 등을 숙소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21년부터 농촌 빈집이나 이동식 조립주택을 고쳐 이주노동자 숙소로 사용하려는 농가에 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미 전북 고창에 농업 이주노동자를 위한 공공형 기숙사가 만들어졌고, 올해 전남 해남과 충남 청양에 이어 2026년까지 전국 20곳에 이주노동자 기숙사를 만든다는 게 농식품부 계획이다. 경기도는 지난해 2월 이주노동자 전용 공공기숙사 설립 등 주거 개선책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업종·사업주 따라 처지는 천차만별

같은 지역에서 일해도 업종과 사업주에 따라 주거 환경에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지난 19일 충남 논산의 이주노동자 한국어교실에서 만난 스리랑카인 잔드리(35)는 생활가전 폐기물 분리업체에서 일하는 같은 국적의 동료 4명과 함께 번화가 쪽 빌라에 살고 있다. 방 3개를 4명이 나눠 쓰고, 한 사람당 6만원을 숙소비로 매달 낸다. 미얀마인 완(가명)도 사업주가 제공한 번화가 쪽 아파트에 다른 국적의 회사 동료 3명과 함께 살지만 숙소비는 내지 않고 있다. 네팔인 이샨(가명)은 공장 인근 기숙사 건물에 사는데 “1인 1실이라 매우 만족한다”고 했다. 김치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우즈베키스탄인 이모나(가명)는 공장 옆 컨테이너 숙소에서 살지만, 독방에 화장실·주방이 잘 갖춰진 깨끗한 공간이라 “사는 데 불편함이 없다”고 말했다.

충남 논산의 김치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우즈베키스탄인 이모나(가명)가 사는 공장 옆 가설건축물(컨테이너) 숙소 안 모습. 윤향희 제공

충남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의 윤향희 책임연구원은 “사업주가 숙소를 제공해도 다 무료인 건 아니어서, 아예 다른 숙소를 스스로 구해 사는 경우도 많다. 비수도권은 내국인들이 떠나며 비게 된 저렴하고 상태 좋은 집들이 많기 때문에 수도권보다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고 했다. 장수현 건양대 이주민사회통합연구소 실장도 “농촌 지역에 이주노동자를 상대로 한 출퇴근 차량 영업도 흔하다 보니, 승용차가 없어도 사업장에서 거리가 있는 지역에 살면서 출퇴근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열악한 숙소를 제공하고 돈까지 받는 사업주도 있지만, 정보화 시대에 젊은 이주노동자들이 자구책을 찾아 ‘그저 참고 당하지 않는’ 경향도 분명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스마트폰 이용과 정보 검색에 능숙해 지역별·국적별 네트워크를 이용해 부동산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별 선호에 맞는 주거공간을 찾는 사례도 차츰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정부는 “관리 방안 마련 중”이라지만

그러나 ‘속헹의 비닐하우스’가 아직은 대부분의 이주노동자가 마주하는 현실이란 지적이 여전하다. 충북 음성에 있는 소피아외국인센터의 고소피아 센터장은 “외딴 농장 등에 이주노동자 숙소라며 비닐하우스·컨테이너 등을 두는 경우는 여전히 많다”며 “노동자를 들여오기 전에 기숙사 조건과 상태를 구체적이고 상세히 사진·영상 등으로 보여주고 근로계약을 체결해야 하는데, 현실에선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다각도의 관리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말한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근로계약 때 주거 관련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을 수 있게 이주노동자가 모국어 누리집에서 직접 기숙사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 곧 운영에 들어간다”고 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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