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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인 근로자가 유해 환경에 노출돼 질병을 가진 자녀를 낳았다면 이를 업무상 재해로 보는 이른바 ‘태아 산재’가 최근 연이어 인정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1월 ‘태아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시행된 뒤, 인공신장실에서 근무했던 간호사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근로자 3명 등 여성 근로자 4명이 태아 산재를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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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일(31일), 태아 산재를 신청한 첫 ‘아빠’에 대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열립니다. 과거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던 42살 정 모 씨 사례로, 산재 신청 2년 반 만입니다.

■ “LCD 생산공정서 유해물질 노출”…희귀병 갖고 태어난 아들

정 씨는 2004년 삼성전자 LCD사업부에 입사해 2년간 안전보건 업무를 담당하는 안전환경팀에서 일했습니다. 2006년부터는 자동광학검사 설비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엔지니어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2008년 5월 아들이 태어났고, 2011년 5월 ‘차지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진단받았습니다. C(눈), H(심장), A(후비공), R(발달), G(생식기), E(귀) 등 여러 장기에 동시다발적으로 기형이 나타났습니다.

정 씨는 엔지니어 근무 당시 LCD 제조공정에서 노출된 유해인자로 인해 아들이 선천적 질환을 갖게 됐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독한 화학물질을 다뤘음에도 적절한 호흡용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았고, 가공라인 내 포토공정과 식각공정 등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에 고농도로 노출됐다는 게 정 씨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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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태아 산재’ 첫 심의한 역학조사위… “향후 사회적 합의수준 결정해야”

지난 21일, 정 씨는 2년 넘게 기다렸던 역학조사 결과를 전달받았습니다. 역학조사평가위원회는 아이의 질환과 정 씨의 업무 사이 관련성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보고서 안엔 의미 있는 대목이 적지 않았습니다.

임신 전 유해요인 노출이 아버지인 정 씨의 생식세포 돌연변이 유발 위험을 높이는지가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다뤄졌는데, 아직까지는 직접적 연구가 수행되지 않았다는 게 역학조사위 설명이었습니다.

지난 3월 15일, 시민단체 ‘반올림’ 소속 활동가들이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남부지사 앞에서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들의 ‘태아 산재’ 인정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는 모습.

이에 위원회는, 반도체 산업에서 종사하는 남성 근로자들의 임신지연, 조기유산 또는 사산, 태아의 선천성 기형 발생위험에 대한 국내외 문헌을 대신 살펴봤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 타이완의 연구 사례였습니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 타이완의 8개 반도체 회사에 고용된 남성 근로자 6,834명을 대상으로 포함한 조사를 보면, 임신 두 달 전 남성이 반도체 회사에 고용됐던 집단에서 자녀의 선천성 기형과 심장 기형으로 인한 사망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밖에도 2015년 국내에서 수행된 반도체 건강 조사와 2022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진행한 근로자 생식보건 역학연구 등을 종합해볼 때, 위원회는 “반도체산업 남성 근로자 자녀의 선천성기형 발병 및 사망, 사산의 위험이 일치하게 높았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여러 제반 사항을 고려해 “향후 업무관련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은 근거가 될 만한 연구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좀 더 포괄적인 논의의 필요성을 짚은 거로 보입니다.


사건을 대리한 ‘반올림’ 소속 조승규 노무사는 “보고서의 분위기는 삼성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들 건과 유사하거나 조금 더 유리하게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역학조사 결과를 확인한 정 씨도 “이번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태아 산재로 인정된다면 우리나라에서 아버지에 대한 태아 산재가 최초로 인정받는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이어 “저와 같이 태아 산재로 인해 고통받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이라며 “그분들에게도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습니다.


■ 현행법상 ‘최종 승인’은 불가능…‘아빠 태아산재법’ 개정될까?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역학조사에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인정됐지만, 최종적으로 산재가 승인된 비율은 2022년 18.7%, 2023년 16.3%로 집계됐습니다.

앞서 태아 산재를 인정받은 삼성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 3명의 경우에도 역학조사에선 업무관련성이 인정되지 않았던 만큼, 이번에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의 결론은 다를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질판위가 업무관련성을 인정하는 판단을 내리더라도, 최종적으로 정 씨가 산재 인정의 혜택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현행 산재보험법은 아빠의 태아 산재는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1년 법 개정 과정에서도 소관 부처인 고용노동부의 반대 등으로 ‘아버지’에 관한 문제는 따로 논의되지 않았고, ‘태아가 모(母)와 단일체일 때’ 발생한 업무상 사고와 질병만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91조의12(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유해인자의 취급이나 노출로 인하여, 출산한 자녀에게 부상, 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그 자녀가 사망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산재보험법상으론 태아 산재의 경우 어머니만 인정되고, 아버지는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며 “다만 질판위는 순수하게 상병과 업무의 관련성에 대해서만 평가할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산재 신청인의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 ▲적용 사업장이 아닌 경우 등엔 질판위가 업무관련성을 인정하더라도 최종 산재 승인이 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시민단체 ‘반올림’은 22대 국회에서 아버지까지 태아 산재 인정 범위에 포함할 수 있도록 산재보험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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