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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작가 <토지> 일어 완역한 시미즈 지사코
요시카와 나기와 공동번역, 20권 완역은 최초
경상도·전라도·함경도…사투리 이해 가장 힘들어
작품 속 배경인 하동, 간도, 블라디보스토크 답사
“‘토지’ 번역하며 세상을 넓게 보는 힘 생겨”
“일본, 한국문학 인기…1970~80년대 원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를 일본어로 완역한 시미즈 치사코 씨가 2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終(종). 지난 8일 시미즈 지사코는 10년간의 대장정을 마치며 마지막 글자를 원고에 써넣었다. 이로써 20권에 달하는 대하소설 <토지>의 일어 번역이 완결됐다. 2015년 시미즈와 요시카와 나기는 고 박경리 작가 <토지>의 일어 공동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2016년 11월에 일어로 번역된 <토지> 1권이 일본 쿠온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마지막 20권은 올 9월 나올 예정이다.

<토지>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등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일부 출간됐지만, 20권이 모두 번역돼 완간되는 건 일본이 처음이다. 지난 26일 경향신문사를 찾은 시미즈는 “마치 마라톤을 끝낸 기분이다. 한 권 한 권 번역을 끝낼 때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진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했는데, 이번에 ‘끝(終)’이라고 쓰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눈물도 조금 났다”고 말했다.

<토지>는 1897년 조선 말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1945년 광복까지 이어지는 48년의 역사를 담은 대하소설이다. 경남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 최참판댁이 몰락하면서 주인공 최서희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담았다. 동학농민운동, 을사늑약, 청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남경학살 등 동아시아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고, 최서희 일가를 중심으로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그려진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해 1994년 완간됐으며, 등장인물만 700명에 달하고 원고지로 4만여 장에 이르는 대작이다.

쿠온출판사에서 일본어로 번역 출간된 박경리 작가의 <토지> . 쿠온출판사 제공


시미즈는 오사카외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요미우리 신문에서 15년간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다. 현재는 작가로 활동하며 한국문학을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을 한 요시카와는 인하대에서 정지용 시인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를 수료했다. 고 신경림 시인의 시선집을 비롯해 다수의 한국문학을 번역했다.

각 권을 번갈아 가며 번역한 두 번역가는 <토지>의 방대한 내용이 공동 번역 과정에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역어, 표기법, 등장인물들의 이름 등을 공유했다. 몇 가지 원칙도 세웠다. <토지>에는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 다양한 사투리가 등장하는데 이를 일본 특정 지역의 방언으로 대체하지 않기로 했다. 또 당시 한국의 인명, 지명, 습관, 복장, 음식, 주거환경, 역사 등이 외국 독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만큼 이해를 돕기 위해 되도록 간결한 문장으로 번역하기로 했다.

시미즈는 처음 출판사로부터 번역을 제안받았을 때 ‘반일 소설’이라는 일각의 평가 때문에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일본에서 혐한 분위기가 고조됐을 때라 과연 이 작품이 일본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까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의 불안한 마음은 최유찬 전 토지학회 회장이 해소해 줬다. “최유찬 선생님께 <토지>가 ‘반일 소설’이라고 하는 말이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었어요. 선생님은 ‘<토지>를 반일소설로 보는 것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며 ‘이 작품에 담긴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지 결코 누구를 원망하거나 복수할 것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었어요.”

쿠온출판사에서 일본어로 번역 출간된 박경리 작가의 <토지> . 쿠온출판사 제공


<토지> 번역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대적 배경이 100여 년 전이다 보니 당시 사회·문화적 배경이 낯설기도 했고, 특히 사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미즈는 “사투리를 이해하고 번역하는 게 어려웠다. 1부(1~4권)에는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고 2부(5~8권)에서 공간적 배경이 간도 용정으로 이동하면서 함경도 사투리가 등장한다. 특히 함경도 사투리가 어려웠는데 그럴 때마다 문장을 소리 내 읽으면서 익숙해지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번역하면서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크고 넓게 보는 힘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70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접하면서 인간의 다면적인 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작품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동학농민운동, 항일 독립운동, 강제징용 등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찾아 읽었다. 시미즈는 “<토지>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나오는데 전적으로 선하다고만, 또는 악하다고만 할 수 없는 점들이 있다. 악한 사람들은 이런 면이 있어서 악한 행동을 했고, 선한 사람도 겉으로는 선해 보이지만 다른 면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번역이 쉽지 않아 울면서 번역한 적도 있다. 어려워서만은 아니다. 월선이와 용이의 이별, 월선이가 죽는 장면, 봉순이를 향한 석이의 안타까운 마음 등을 번역할 때는 너무 울어서 번역이 중단되기도 했다. 또 작품 속 지식인들이 세계정세를 점치고,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들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을 번역할 때는 나도 그 자리에서 함께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을 좀 더 크게 넓게 보는 힘이 생겼다”라고 설명했다.

<토지>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역 곳곳도 답사했다. 토지문학관이 있는 강원도 원주, 작품 속 최참판댁의 배경인 경남 하동 평사리를 방문했다. 또 평사리를 떠나 ‘서희’와 ‘길상’이 이주한 간도 용정, 독립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 실존 인물인 최재형 선생의 항일 기념비가 있는 우수리스크 등도 찾았다. 찾아간 장소마다 작품 속 등장인물과 작가의 심정이 떠올랐고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 간도 용정 비암산은 항일운동하던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이자 가곡 ‘선구자’의 해란강, 일송정이 있는 곳이다. 비암산 위에 올라 내려다본 경치는 소설의 공간을 재현해 놓은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주변과 비슷했다. 그는 “평사리를 떠난 등장인물들도 비암산에 올라 고향을 생각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를 일본어로 완역한 시미즈 치사코 씨가 2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며 번역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최근 한국 소설들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토지>의 독자층은 아직 넓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다음 권이 언제 나오냐’며 출판사에 출간을 독촉하는 연락이 꽤 올 만큼 ‘충성 독자’층이 형성돼 있다. 시미즈는 몇 년간 일본 출판계에 일고 있는 한국 문학에 대한 수요가 그 뿌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 독자들이 한국문학에 빠지는 이유는 작품들 속에 사회문제나 역사적 사건이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내면을 그리는 장면에서도 사회문제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들이 내비치는 경우가 많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메시지가 일본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아요. 이런 한국문학 팬들의 특징은 지금 유행하는 작품에 그치지 않고 1990년대, 80년대, 70년대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한국문학의 원류를 찾아 읽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강원도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 창작실에서 편집자와 함께 퇴고 과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원주에서 박경리 작가를 생각하며 번역작업을 하고 싶다는 오랜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다. 올 10월에는 완간을 기념해 일본 독자들과 함께 통영을 찾아 헌정식을 할 예정이다. 2016년 <토지> 1권이 일본에서 출간됐을 때도 일본 독자들과 통영에 있는 박경리 작가의 묘소를 찾아 헌정식을 열었다.

“박경리 선생님이 살아 계신다면 여쭤보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아요. 번역을 시작할 때 따님인 고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님이 너무 원문에 얽매이지 말고 오늘날의 일본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내용을 전달해주면 좋겠다고 격려와 응원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내 시작할 수 있었지요.”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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