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난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출입기자들 대상 만찬. 대통령실 제공


김영희 | 편집인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지난 24일 출입기자 만찬에서 앞치마를 두른 윤석열 대통령은 행복해 보였다. 현장메모를 보면, 기자 200여명이 나눠 앉은 20개 테이블을 일일이 돌며 한 말의 대부분은 “종종 합시다” “뭐 좀 먹었어요?”였다.

미국 대통령들의 위트 있는 연설과 초청 게스트의 날카로운 풍자로 매해 화제가 되는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 행사 같은 전통이 우리에게도 생긴다면,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용도 시기도 고약하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채 상병 특검법’ 거부권에 대한 국회 재의결, 그리고 바로 다음날 시민사회와 야당들이 총집결하는 대규모 집회가 예고된 터에 현안 질문 하나 못 하는 김치찌개 만찬이라니. 갑자기 기자 연수 확대를 언급한 것도 황당했다.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추락했다는 최근 잇단 발표는 대통령에게만 딴 나라 이야기인 듯하다.

지난 4월 총선 이후 윤 대통령의 행보는 보통 사람의 상식과 염치로는 이해 불가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김건희 여사는 검찰 수뇌부 인사 며칠 만에 보란 듯 아무 말 없이 공개 행보를 재개했다. 공정과 상식은커녕 오로지 ‘대통령직 유지와 부부의 생존이 국정방향’이란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정치권에 ‘빚’이 없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보수로서도 통탄할 일일 것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 최순실씨와 연락을 주로 맡았던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기용은 보수 매체 논설위원이 ‘안드로메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기괴한 일이다. 당시 검찰이 압수한 그의 휴대전화 속에서 35시간40분 분량, 236개 녹음파일이 쏟아지며 국정농단 실태가 생생하게 드러났다. 최순실씨 문제에 입 한번 벙긋 못 한 그가 설령 똑똑한들 무슨 소용인가. 윤 대통령이 높이 평가했다는 능력은 이런 ‘충성심’인가. 과거 국정원 댓글 수사 외압 논란 관계자로 윤 대통령과 악연이 깊은 김주현 전 법무부 차관을 민정수석에 앉힌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의 기용은 보수 지지층 강화에도 별 도움이 안 된다. ‘아니면 말고’ 식 박영선 총리, 양정철 비서실장 설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회담 전 함성득-임혁백 교수 사이 물밑협상에서 흘러나온 말들까지 보면, 윤 대통령은 더더욱 정통 보수와 거리가 멀다.

대통령 거부권 합리화를 위해 총대를 멘 정부 기관의 신뢰 훼손은 어찌할 건가. 채 상병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한 날, 법무부가 보도자료에서 밝힌 내용은 바로 언론들의 팩트체크에 의해 궤변과 거짓으로 드러났다. 작성 주체는 법무실 법무심의관이다. 검사 후배에게 이런 자료를 만들도록 하는 게 검찰을 그토록 사랑한다는 대통령이란 게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정책 결정과 집행의 난맥상은 심각하다. 해외 직구 금지 번복 이후 각 부처가 정책 발표를 보류하며 눈치만 보고 있다. 이재명 대표가 불쑥 21대 국회 막판에 연금개혁 합의 카드를 꺼낸 건 정치적 공세 성격이 있지만, 그걸 핑계로 개혁의 첫 단추를 끼울 기회를 걷어찬 건 어불성설이다. ‘국민공감’ 이야기를 하는데 이미 오랜 시간 전문가들의 논쟁 끝에 모수개혁 안도 나와있고 시민숙의 과정도 거쳤다. 물론 연금개혁은 인기있는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도 논란 끝에 결국 현행유지로 성과없이 끝냈다. 당분간 선거가 없는 지금도 어려운데 22대에서 구조개혁까지 일괄타결하자는 말의 진정성을 몇 명이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보수 논객인 언론인 정규재는 여당이 연금 모수개혁 기회를 팽개친 건 채 상병 특검안 가결 차단을 위한 것이라고 거세게 비판하며 “윤석열 대통령 유지비용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현장 지휘관들의 철수 건의가 사단장에 의해 거절됐다는 여단장의 언급. 다큐 ‘고 채 상병 죽음의 공동정범’ 갈무리.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을 앞두고 대통령 격노설 보도가 잇따르자 일부 여당 의원들이 ‘격노가 뭐가 문제냐’며 방어에 나섰다. 반만 맞다. 지금 쟁점은 그런 격노가 위법적 지시나 외압으로 이어지지 않았냐는 의혹이다. 상황을 파악하지 않은 채 격노부터 하는 상사는 이견을 가로막고 조직을 망가뜨린다는 게 만고의 진리다.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26일 한겨레티브이(TV)가 공개한 다큐멘터리 ‘고 채 상병 죽음의 공동정범’을 보길 권한다. 새로 공개된 녹음파일 등엔 임성근 사단장의 격노가 어떻게 현장 상황을 바꿨는지 정황이 담겨 있다. 부하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책임질 것을 피하지 않는 포7 대대장의 사건 당일 녹음파일도 들어보길 바란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고 진정한 군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게 진영을 따질 일인가.

총선 민심은 여당에도 대통령실에 할 말은 하는 당이 되라는 것이었다. 당장은 28일 국민의힘 의원들 투표가 보수의 미래를 가늠하게 할 것이다. 여당이 똘똘 뭉쳐 부결시키는 게 외려 22대 국회에서 채 상병·김건희 쌍특검의 동력만 높일 뿐이란 걸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채 상병 사망 사건은 애초 박정훈 대령이 이종섭 장관에게 결재받은 대로 경찰에 넘겨 수사하고 혐의 여부를 판단하면 될 일이었다. 특검도 마찬가지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지 말라. 다음은 가래도 소용없다.

한겨레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7836 '휴가' 대통령이 '출장' 장관에 전화... 긴박 현안 '채상병' 논의 가능성 충분 랭크뉴스 2024.05.30
27835 저출생이 정자 문제?... 혈세 들여 정자 분석·정관 복원 지원한다니 '분노' 랭크뉴스 2024.05.30
27834 [단독] 비행 악순환 빠진 '정신질환 소년범'... 대법, 치료기관 확충 연구 랭크뉴스 2024.05.30
27833 '의대 증원' 반영된 대입전형 시행계획 발표…의협은 '촛불집회' 랭크뉴스 2024.05.30
27832 사망사고 초동수사 軍이 주도... '채상병 사건'처럼 외압 의혹 빌미만 제공 랭크뉴스 2024.05.30
27831 "尹 거부권, 野 다수결 맹신 버려야"... 극단적 여소야대 상생 해법[22대 국회 개원] 랭크뉴스 2024.05.30
27830 ‘악질’ 30대男…청소년 포함 여성 수십명 성적학대하고 불법촬영 랭크뉴스 2024.05.30
27829 오픈AI, 직원 10만명 회계업체 PwC와 챗GPT 사용 계약 랭크뉴스 2024.05.30
27828 보험금 노리고 차선 넘은 차 일부러 ‘쾅쾅’…'3억' 챙긴 20대 일당의 최후 랭크뉴스 2024.05.30
27827 과기정통 차관, 국제회의서 "AI는 안전·포용·혁신 지향"(종합) 랭크뉴스 2024.05.30
27826 ‘전공의 없는 병원’ 100일째…의·정갈등에 고통받는 환자들 랭크뉴스 2024.05.30
27825 ‘송영길 재판’에 나온 이정근 “돈 봉투 보고했다”…증언 회유 주장도 랭크뉴스 2024.05.30
27824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진 강아지 6마리 결국…눈물 터진 사연 랭크뉴스 2024.05.30
27823 한국, UAE와 ‘CEPA’ 체결…아랍권 국가와 첫 자유무역협정 랭크뉴스 2024.05.30
27822 태국 왕궁에 딸 소변 누게 한 부모…아빠 백팩 보니 중국인? 랭크뉴스 2024.05.30
27821 "넷플 계정 같이 쓸래요?"…대학생 130명에 '1000만원' 뜯은 20대 결국 랭크뉴스 2024.05.30
27820 윤 대통령·이종섭 통화 겨냥한 야 “최순실 태블릿처럼 스모킹 건” 랭크뉴스 2024.05.30
27819 서창록 고려대 교수, 유엔 '시민·정치 권리위' 위원 재선출 랭크뉴스 2024.05.30
27818 ‘북한 풍선 만지지 마세요’…한밤중 울린 합참 ‘위급 재난 문자’ 랭크뉴스 2024.05.30
27817 성관계 무음 카메라로 몰카…아이돌 출신 래퍼 징역 3년 구형 랭크뉴스 2024.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