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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중 사회부장 겸 스포트라이트부장

2020년 2월 초 미국 대선의 풍향계로 불리는 ‘아이오와 코커스’를 현지에서 취재한 적이 있다. 공화당은 재선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가 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관심은 민주당에 쏠렸다. 민주당의 아이오와 코커스는 당원들이 모여 각자 지지하는 후보를 나타내는 푯말 앞에 서는 공개투표 방식이다. 당원대회에 온 당원이 어림잡아 50명이 되지 않는 작은 투표구를 찾아가 참관했다. 한국에서 온 기자의 질문에 사뭇 진지하게 각자 지지하는 후보의 장점을 역설했다.

그중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민주당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샌더스 상원의원이 공약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지지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그는 “한국의 건강보험 제도는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가 건강보험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초강대국 미국에 공적 건강보험이 없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실제로 해외에 장기 체류한 사람들은 한국 의료체계가 얼마나 우수한지 피부로 실감하게 된다. 진료를 예약하려고 했더니 병원에서 몇달 뒤에 오라고 했다거나, 간단한 시술을 받았을 뿐인데 눈이 튀어나올 만큼 많은 비용이 청구되더라는 얘기는 해외 장기 체류자나 교민들 사이에선 전설이 아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의료 서비스의 수준과 접근성이 높으면서도 전 국민 건강보험 덕분에 개인이 부담하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낮다. 한국이 이처럼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풍부하게 공급하고, 본인 부담을 낮추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건 공급자인 의료계와 제도를 관리하는 정부, 소비자인 시민사회의 노력과 지혜, 견제와 균형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위기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사 되고 싶다는 사람은 많은데 너도나도 돈 많이 벌고 위험은 낮은 분야로 몰려가다 보니 필수의료 분야 인력이 부족하다는 경고음이 들려왔다. 중증 응급환자가 진료를 해줄 병원을 찾지 못해 ‘뺑뺑이’를 돌다가 시간을 놓쳐 목숨을 잃는 사례도 생겨났다. 의료 서비스의 높은 질과 공급, 낮은 비용이라는 ‘황금의 삼각형’ 가운데 공급 측면에서 빨간불이 들어온 것이다.

‘의·정 갈등’의 시발점이다. 정부는 의료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의사가 늘어나야 한다며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카드를 던졌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의대 증원 찬성 여론이 70~80%로 나올 정도로 소비자인 시민도 이에 동의한다.

의사들은 생각이 다르다. 낮은 수가와 고된 근무여건, 높은 위험 등 필수의료 분야 기피 현상의 원인이 고쳐지지 않으면 의사를 늘려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 아니라 건강보험 재정만 더 축낼 것이라고 반대한다.

낼모레면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에 사표를 던지고 집단행동에 들어간 지 100일째가 된다. 정부와 의료계는 각자 ‘승리의 경험’을 가지고 이번 사태에 임한 것 같다. 정부는 2022년 말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를 요구하는 화물연대 파업에 강공 드라이브로 일관해 완전히 굴복시켰다. 총선을 앞두고 의대 증원에 대한 국민 지지 여론이 높다는 점도 자신감을 높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의대 정원을 왜 한꺼번에 2000명이나 늘려야 하는지는 의사들에게도, 국민에게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의사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 그리고 이전 정권에서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을 번번이 무산시킨 경험이 있다. 의사들로선 ‘버티면 이긴다’는 것을 체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료계는 의대 정원을 한번에 2000명이나 늘리는 건 무리라는 합리적인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의대 정원을 왜 한 명도 늘려선 안 되는지에 대해선 국민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대학들이 내년도 입시 계획을 사실상 확정하면서 의대 증원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얼마 전 사적인 모임에서 만난 한 의대 교수는 “당분간은 아프지들 마시라”고 했다. 이번 의·정 갈등이 불러올 연쇄적인 파장, 그리고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에 따른 부작용이 불 보듯 훤하다는 얘기였다. 정부는 의대 증원이라는 1차 목표는 관철시켰지만 전공의와 의대생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과제는 여전히 남았다. 미래의 의료인력 공급을 늘리기 위해 당장의 의료 공급 공백이 지속되어선 안 된다. ‘당분간’ 아프지 않고 싶다고 해서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 아닌가.

김재중 사회부장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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