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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서울 금천구 안양천 옆 광장에서 금천구청장배 건강달리기 대회가 열렸다. 완주자들은 메달 대신 수육과 두부김치, 막걸리 등 먹거리를 받으며 대회를 즐겼다. 김서원 기자
26일 오전 9시쯤 서울 금천구 안양천 옆 다목적 광장. 평소 주말과 달리 이곳에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몸을 풀고 있었다. 올해로 20회를 맞은 ‘금천구청장배 건강달리기 대회(5㎞·10㎞)’ 참가자들이었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20여 분이 지나자, 광장엔 돼지 수육을 삶는 냄새가 퍼지고 막걸리 수 백병이 등장했다. 5㎞ 코스 선두 주자들이 반환점인 경기 광명의 철산대교를 찍고 돌아와 결승선을 막 통과할 때쯤이었다. 코스를 완주한 참가자들은 땀에 흠뻑 젖은 옷이 채 마르기도 전에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음식을 즐겼다.

26일 오전 9시 '제20회 금천구청장배 건강달리기 대회'10㎞ 코스 참가자들이 출발하는 모습. '늦게 들어오면 수육 못 먹는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10㎞ 코스보다 5㎞ 코스 인기가 더 많았다. 김서원 기자
이번 대회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수육런(수육+달리기)으로 불리며 큰 화제를 모았다. 통상적인 달리기 대회와 달리 완주자에게 메달도, 기록칩도 주지 않는다. 대신 참가비 1만원을 내면 기록과 상관없이 5000원 상당의 기념품과 보쌈·두부김치·막걸리 등 먹거리를 무제한 제공한다.
지난달 23일 "접속자 폭주로 인한 시스템 장애로 선착순 모집 인원인 950명을 초과해 접수됐다"는 공지가 금천구 육상연맹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사진 금천구 육상연맹 홈페이지 캡처
이같은 내용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퍼지면서 신청 접수 날인 지난달 23일엔 금천구 육상연맹 홈페이지 서버가 마비되기도 했다. 참가자 950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하는데 10만명 이상이 몰렸다. “늦게 결승선에 들어가면 고기 없다”는 후기가 공유되면서 10㎞ 코스보다 5㎞ 코스가 먼저 마감됐고, 신청에 실패한 수천 명이 미리 공지된 계좌에 참가비를 보내는 바람에 주관사 측이 일일이 다시 돌려주는 일도 벌어졌다. SNS엔 실패한 사람들이 “우리끼리 뛰고 끝나고 수육 사먹자”며 모임을 구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한 막걸리 회사는 다음 달 1일 강남구 서초에서 냉제육과 백김치국수, 막걸리 등을 제공하는 ‘제육런’을 개최하기로 했다.
2024 금천구청장배 건강달리기 대회 참가자들이 출발 전 몸을 풀고 있다. 김서원 기자
대회를 주관한 금천구 육상연맹은 올해 수육 600근(약 360㎏)과 막걸리 1100병을 준비했다. 한 근을 4인분으로 계산하면, 2400인분을 준비한 셈이다. 지난해 400근에서 50%가량 더 늘렸다. 이광남 금천구 육상연맹 회장은 “수육을 제공한 건 2010년쯤부터인데 SNS에 여러 후기가 쏟아지면서 4~5년 전부터 젊은 참가자들이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 참가자 가운데 70% 이상이 90년대생이었다. 젊은 참가자들은 기록보다 가족·친구·연인 등과 함께 추억을 쌓는 경험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출발선에서 만난 경기 시흥에서 온 정예은(23)씨는 “아빠, 언니랑 뛰는 세 번째 마라톤인데 끝나고 수육 먹을 생각에 신난다”며 “기록과 상관없이 색다른 재미를 위해 신청했다”고 말했다. 고대구로병원 약제팀 내 러닝 소모임 동료들과 함께 5㎞를 완주한 엄기대(31)씨는 “주말 아침에 동료들과 친목 도모하는 데 의미를 뒀다”고 했다.
고대구로병원 약제팀 내 러닝 소모임 동료들과 함께 5㎞ 코스를 완주한 엄기대(31·가운데)씨가 막걸리 한 잔을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서원 기자
수육이라는 특별한 보상에 이끌려 마라톤대회에 처음 참가한 이들도 많았다. 인천에서 온 김상아(25)씨는 “수육이란 미끼에 끌려 대회를 신청한 건 사실이지만 나만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주간 치열하게 훈련했다”며 “덕분에 취미를 달리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길예립(26)씨는 “신청이 치열해 러닝크루 중 혼자 접수에 성공했다”며 “기록은 스마트폰 앱으로 재고 대회와 수육을 즐기기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제20회 금천구청장배 건강달리기 대회 참가자들이 수육과 두부, 김치 등을 받고 있는 모습. 김서원 기자
MZ세대 사이에서 수육런처럼 이색적인 규칙이나 보상을 내세운 이색 마라톤이 하나의 문화로 확장하고 있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빵을 더 건강하고 맛있게 먹기 위해 달리게 한다”는 취지로 한 공연·행사 기획회사가 주최한 ‘빵빵런’이 대표적이다. 올해로 4회째 열린 빵빵런 참가자들은 “기념품이 풍부해 가볍게 가서 무겁게 돌아온다”, “성취감을 배터지게 먹고 간다”, “살찌는 건 싫지만 빵은 먹고 싶어서” 등 후기를 온라인에 공유했다. 장바구니에 원하는 물건을 담고 완주하면 담은 물건을 모두 공짜로 주는 우아한형제들의 ‘장보기 오픈런’이나, 여러 색깔의 옥수수 전분 가루를 뿌리는 부산의 ‘컬러 레이스’ 등도 있다. 국내 최고층 건물인 서울 롯데타워의 123층 2917개 계단을 오르는 수직 마라톤 대회 ‘스카이런’에는 지난달 2200여 명이 참가했다.
차준홍 기자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젊은 층이 많은데, 그 과정에 순위·기록 등 경쟁 요소가 개입하면 정신적 만족감이 줄어들 수 있다”며 “이때문에 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려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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