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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서울의 한 식당에서 직원이 접시를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얼마 전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손님들이 종업원을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장님’, ‘여기요’, ‘이모’ 등등 제각각이었다. 종업원을 부를 필요가 없긴 했지만, 혹시 부른다면 어떻게 불러야 할까 잠깐 생각했다.

1983년, 처음 한국어를 공부할 때 종업원은 ‘여보세요’라고 부른다고 배웠다. 전화받을 때와 똑같다는 게 신기했다. 교실 밖에서는 ‘여보세요’가 아니라 ‘아줌마’를 많이 쓴다는 걸 곧 알게됐다. 이후로는 일반적인 한국인들처럼 여성에게는 아줌마, 남성에게는 아저씨를 주로 사용했다. 여성들끼리는 종업원을 부를 때 ‘언니’라는 호칭을 자주 쓰지만, 남성들 사이에서 ‘형’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부터 아줌마라는 말은 어쩐지 쓰기가 거북했다. 아저씨는 그보다는 오래 쓰긴 했지만 빈도가 줄어들었다. 주류는 ‘여기요’였다. 내게 ‘여기요’는 어쩐지 갑질의 어감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 편하게 쓰기 어려웠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조금은 부드러운 어감처럼 느껴지는 ‘여기 주문이요’라는 말이 자주 들렸다. 하지만 갑질의 어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날 가장 많이 들리는 호칭은 ‘사장님’이다. 작은 식당들은 ‘사장님’이 혼자 주문도 받고 계산도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규모가 있는 식당 종업원은 엄연히 사장님과 다른 일을 한다. 그럼에도 손님들은 종업원에게 사장님이라고 한다. 실제 사장이 아니라는 걸 손님도 알고 종업원도 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은 아이엠에프(IMF)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득과 소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서비스 업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2010년대부터 에스엔에스(SNS)를 통한 정보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서비스 평가도 실시간으로 전파됐다. 개인 간에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도시 문화’가 일상화하면서 언어 역시 이런 변화를 반영하게 됐다. 그러면서 종업원과 손님 사이에 존재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호칭은 ‘촌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사장님’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호칭을 더 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늘어났다.

변화는 호칭에서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서비스 현장에서 나이 많은 이들에게 반말을 쓰는 경우가 꽤 많았다. 무례한 태도가 아닌 친근함이 담긴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21세기에 접어든 언젠가부터 반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대신 ‘~요’로 끝나는 해요체와 반말을 섞어 쓰는 경우가 늘어났다.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끼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한편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 단골 식당에서 종업원을 향해 ‘이모’라고 부르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한국어 원어민이 아닌 내 입장에서는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마다 적당한 말을 찾기가 좀 어렵다. ‘사장님’은 지나치게 과한 존댓말처럼 여겨지고, ‘이모’를 사용할 용기까지는 없다. ‘아줌마’나 ‘아저씨’는 어쩐지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쁠 것 같고, ‘여기요’에는 갑질 같은 어감이 배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최근에는 눈을 맞춘 상태로 살짝 웃은 뒤에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먼저 건넨 뒤 필요한 걸 말한다. 말하는 나도, 듣는 그들도 부자연스럽지만, 대부분 반갑게 받아준다.

흥미롭게도 종업원이 손님을 부르는 말도 달라졌다. 20세기 말 젊은 남성에게는 ‘학생’, 또는 ‘총각’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런 호칭은 거의 사라졌다. 개인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손님’을 ‘손님’이라 부르고, 대기업 체인점에서는 ‘고객’을 ‘고객’이라 부른다. 내게는 어쩐지 조금은 삭막한 느낌이다.

과연 음식점에서 모두가 편안한 호칭은 뭘까. 어쩌면 한국의 종업원이나 손님들 모두 서로를 존중하되 서로가 편안한 호칭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이때를 지나 서로가 편안한 호칭을 주고 받는 그런 날이 오면, 그때 수많은 음식점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뭐라고 부를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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