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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89…‘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등
1973년 자비로 300부 한정 ‘농무’
이후 창비시선 1호로 시선집 기조
신경림 시인. 류우종 기자 [email protected]

한국 민중시의 물꼬를 튼 신경림 시인이 22일 오전 8시17분께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9.

신경림 시인은 193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 터진 6·25 전쟁을 겪으며 악몽에 시달리던 시인은 충주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학과 공부보다는 문학 독서에 빠져 지냈다. 동서양 고전과 명작을 두루 섭렵하는 가운데 특히 백석, 임화, 이용악, 오장환, 정지용 등 금기에 묶여 있던 월북 및 납북 문인들의 시를 읽으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1955년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독서회에 가담해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좌익계 서적을 탐독했고, 이듬해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비롯한 시가 추천되어 등단한다. ‘갈대’는 그의 첫 시집 ‘농무’를 대표하는 민중시들과는 전혀 다른 결을 지녔지만, 호젓한 정조와 삶에 관한 명상적 태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갈대’ 전문)

이른 나이에 등단한 시인은 그러나 이듬해 홀연 낙향한 뒤 ‘겨울밤’을 발표하는 1965년 말까지 10년 가까운 시기를 강원도와 충청도 등지를 떠돈다. 이때 광부와 농부, 장사꾼, 인부, 강사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목격하고 경험한 밑바닥 삶은 새로운 차원의 민중시로 바뀌어 시집 ‘농무’의 몸통을 이룬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겨울밤’ 앞부분)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농무’ 앞부분)

그의 시에 그려진 것은 전통적인 농촌 사회가 무너져 가면서 농민들과 날품 인부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 분노였다. 그렇게 희망이 사라진 농촌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온 이들의 삶은 또 어떠했던가.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산 일번지’)에서 보듯 도시의 삶 역시 배경과 세목이 바뀌었달 뿐 신산하고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를 두고 문단 안팎에서 신선하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쏟아졌지만, 신경림 자신은 “실상 제 시는 백석이나 이용악 등등 그 전부터 있다가 끊어진 맥을 다시 이은 거”라고 어느 대담에서 말한 바 있다. 납월북 문인들을 금기로 묶어 놓으면서 우리 문학이 잃어버렸던 전통을 다시 이었을 뿐이라는 뜻이다.

신경림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시집 ‘농무’가 1973년 자비출판 형식에 300부 한정판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어디에서도 시집 출간 제의가 없어서 고민하던 그에게 소설가 이문구가 자신이 일하던 잡지 ‘월간문학’의 이름을 딴 월간문학사 명의를 빌려준 것이다. 이렇게 등록도 되지 않은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이 이듬해 창작과비평사(창비)가 제정한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1975년에는 창비에서 출범한 ‘창비시선’의 첫 권으로 증보 출간되었다. 올해 500권을 넘어선 창비시선의 첫 권으로서 시집 ‘농무’는 이 시집 시리즈의 기조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중시의 전범을 제시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시집의 대중화라는 물꼬도 튼다. ‘농무’는 출간 다음달 비소설 베스트셀러 1위, 당해 4위를 기록한다. 이듬해까지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1974)와 함께 1만부를 돌파한다. 당시 언론이 “서정주 시집이나 소월 시집 이후 최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시인이 계를 들어 자비로 시집을 내던 종전에 비하면 이같은 현상은 기적”(경향신문 1976년 12월2일치)이라 전한 배경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민요에 심취한 그는 1984년에는 민요연구회를 만들어 전국의 민요 현장을 누볐다. 그에 앞서 1979년에는 저 유명한 시 ‘목계장터’가 실린 두 번째 시집 ‘새재’를 출간한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목계장터’ 앞부분)

신경림은 1980년대에도 ‘달 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 노래’ 등을 부지런히 내놓는 한편, 산문집 ‘민요기행’과 평론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등을 펴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로 시작해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로 마무리되는 시 ‘가난한 사랑 노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1980년대에 시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 등 재야 단체의 요직을 맡으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도 열을 올렸다. 1990년대에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시집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등을 묶어 냈다. 산문집 ‘시인을 찾아서’는 베스트셀러 도서가 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로도 ‘뿔’ ‘낙타’ 등을 꾸준히 내며 영원한 현역을 구가한 시인은 생전에 낸 마지막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시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자신의 시와 삶을 이렇게 담담하게 정리했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부분)

신경림 시인은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수상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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