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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서울 한남동의 치즈 전문 레스토랑 '치즈플로'에서 오너이자 치즈 장인인 조장현 셰프와 만났다. 그가 2개월 걸려 만든 톰(Tomme) 치즈를 들고 있다. 전민규 기자
지난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기업은 물론 적잖은 개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평생직장이라 믿었던 일터에서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내몰린 직장인이 한둘이 아니다. 올 초『치즈 마이 라이프』를 낸 서울 한남동의 줄 서는 맛집 '치즈플로'의 조장현(57) 오너 셰프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IMF로 무너진 평생직장 믿음
바뀐 세상 깨닫고 삼성 퇴사
간판 버리고 악조건 요리 택해
인생은 '나의 본질' 찾는 여정
한국이 구제금융을 조기 상환한 2001년 말, 명문대(연세대) 졸업 후 잘 다니던 대기업(삼성전자)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영국 런던으로 떠났다. 그 시절 또래 직장인이 몸값 높이려고 많이들 했던 학위 과정이 아니라 주위에 떳떳하게 밝히기조차 꺼렸던 요리 유학이었다. 평소 요리라곤 해본 적 없고, 모아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부양해야 할 아내와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두 아이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무모한 생각을 실행에 옮긴 이유는 IMF 이후 세상이 바뀐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여년 지난 지금 본인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든 치즈를 서울신라호텔과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에빗)에 납품할 정도로 품질 뛰어난 치즈를 만드는 장인이 됐다.
최근 환율 불안에다 인공지능(AI)으로 인한 직업 소멸 위기 등으로 외환위기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며 인생이 막막하다 여기는 사람이 많다. 조 셰프한테 들을 얘기가 많을 거 같았다. 그가 들려준 인생 이야기를 조 셰프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인생은 선택이다 온 사회가 성장과 (평생직장에 대한) 보장을 당연시하던 1992년 삼성전자에 들어갔다. "뼈를 묻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밤샘과 주말 근무는 일상이었다. 세뇌당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충성심이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지역전문가 선발 기회를 잡았다. 업무 인수·인계를 마치고 출국에 앞서 오리엔테이션만 앞뒀는데 IMF가 터졌다. 기회는 위기가 됐다.

1990년대 초중반 무렵 삼성전자에 다닐 당시 조장현 셰프(오른쪽)의 모습. [사진 조장현]
선택의 원칙 : 과거 대신 미래 간판을 내려놓다 환율이 무섭게 치솟고, 지역전문가는 없던 일이 됐다. 고작 입사 1년 된 신입사원까지 잘려나가는 걸 목격하면서, 평생직장에 대한 믿음이 깨졌다. 학벌·직장, 과거엔 평생을 책임졌던 이런 간판은 미래에 도움이 안 됐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처음엔 남들처럼 스펙 쌓겠다고 공인회계사(CPA) 자격증과 미국 경영대학원(MBA) 준비를 했다. 1년 넘게 했는데 기대만큼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위기였다. 아니, 이번엔 위기가 기회였다. IMF 이후 세상은 확 바뀌었는데, 자격증 따고 더 좋은 간판 달아본들 어차피 내 의지와 상관없이 큰 흐름에 휩쓸려 아무 때고 잘릴 수 있는 똑같은 회사원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바뀐 세상에 걸맞은 인생의 근본적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무슨 학교를 졸업했고, 지금까지 뭘 해왔는지는 아무 소용없었다. 원점으로 돌아가 나만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어려서부터 뭘 좋아했고, 뭘 잘했는지 따져봤다. 그림 동아리를 할 만큼 크리에이티브한 걸 좋아해 산업 디자인 분야도 고려했지만 이 길 역시 공부를 마쳐도 결국 회사원으로 귀결된다 싶어 포기했다.
조장현 셰프가 '르 코르동 블루' 런던 분교 졸업작품으로 낸 요리 스케치. [사진 조장현]
그러던 중 인터넷에서 미국 모던 요리 선구자인 찰리 트로터(1959~2013)를 알게 됐다. 정치학 전공 후 뒤늦게 요리를 배워 자기 이름을 딴 레스토랑을 세계 최고 반열에 올린 인물이다. 이거다, 싶었다. 어릴 때부터 요리를 시작하지 않아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이상하게 잘할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조그만 식당 하나 차려 우리 네 가족 먹여 살릴 수만 있으면 된다'는 소시민적 결심에 이르렀다.

2001년 여름 아내한테 말했다. "회사 그만두고 요리 배우려는데 어떻게 생각해?" 영혼이 자유로운 아내조차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했다. 하지만 이내 더 과감한 제안을 했다. "믿고 따를 테니 한 가지만 약속해줘.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 "

스타 셰프 시대를 활짝 연 '마스터 셰프 코리아'(2012~16)'나 냉장고를 부탁해'(2014~19) 같은 TV 프로그램이 나오기 한참 전이었다. 당시 요리사는 못 배우거나 없는 집 애들이 한다는 편견이 심했다. 그러니 고위 공무원 출신 아버지나 장인 장모의 반대는 당연했다. 솔직히 나 자신도 회사 그만둘 때 "요리 배우러 간다"는 소리를 못했다. 창피해서.
선택의 원칙 : 생각 대신 행동 타이밍을 붙잡다 르 꼬르동 블루 런던 분교에 3000만원 넘는 학비를 보내고 나니, 남은 건 가족이 살던 일산의 조그만 빌라 한 채가 전부였다. 전세 놓고 손에 쥔 3000만원가량, 그리고 이민 가방 2개 달랑 들고 2001년 말 온 가족이 한국을 떠났다.

살인적인 런던 물가를 고려할 때 미친 짓이었다. 한국선 고등학교 교련 교사였던 아내와 함께 안정적 맞벌이를 했지만, 런던선 벌이 없이 네 식구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게다가 아이들은 영어 한마디 못 했다. 하지만 이런 거 저런 거 재기만 하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때 나이 서른다섯, 설령 5년쯤 해보다 바닥에 주저앉더라도 마흔이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마흔에 시작하긴 늦다.
'르 코르동 블루' 런던 분교 유학 시절을 보낸 런던 서쪽 일링 브로드웨이 집에서 함께한 아내(오른쪽)와 두 아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은 아내와의 결혼이다. [사진 조장현]
돌이켜보면 철없어 저지른 일이지만, 지금도 이게 맞다고 본다. 인생은 꼭 잡아야 할 시기가 있다. 놓치면 다시 오지 않기에 무리수를 두더라도 '그때'를 잡아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일단 가자.

그런데, 역시 무리였다. 학비는 물론 애들 안경도 공짜로 맞춰주는 선진국 복지 혜택을 온전히 누렸지만 고작 한두 달 만에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합법·불법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10개월 과정 중간중간 최대한 많이 휴학하며 형편 닿는 대로 파트타임·풀타임 일자리를 구했다. 처음은 동네 펍의 맥주잔 치우는 일이었다. 시급 4.5파운드인데 점심으로 7파운드 넘는 샌드위치 먹기가 아까워, 손님이 손대지 않은 음식을 몰래 챙겨 공원 벤치에서 해결하기도 했다.
빈 맥주잔 치우는 '글라스 콜렉터'로 영국에서 첫 알바를 했던 '크랩트리' 바. [사진 조장현]
그래서 더 초라해 보였나.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형편 좋은 한국 대기업 주재원 부인들이 여럿 있던 학교에서는 "늙은 아저씨가 왜 뒤늦게 유학 와서 걸리적거리느냐"는 수군거림, 주방 보조로 일한 최고급 미쉐린 레스토랑에선 나이 어린 셰프들의 거친 욕설이 일상이었다. 금의환향만 꿈꾸며 견뎠다. 그리고 2004년, 마치 스타 셰프 고든 램지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귀국했다.

여기저기 주방 보조로 이력서를 넣었다. 이 정도 경력이면 모셔갈 줄 알았는데, 1년 가까이 아무 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땐 몰랐다. 주방 인력 대부분 20대라 서른일곱 초자 뽑는 건 부담스러워 한다는 걸.

결국 1년의 구직 활동을 접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2005년 2월, 서울 서래마을에 '키친플로'를 열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손을 벌렸다.
선택의 원칙 : 유행 대신 지속가능성 본질을 직면하다 지금처럼 외식업계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때였다. 별다른 마케팅 없이 런던서 배운 색다른 퓨전 메뉴를 자주 바꾸는 것만으로도 매일 손님이 들어찼다.

기회는 위기가 되고 위기는 기회로 오더니, 이번엔 성공이 독이 됐다. "내가 최고"라는 자만에 취해 번 돈 전부 쏟아부어 매장을 확장하자마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점심·저녁 테이블을 가득 채우던 손님들은 가성비를 좇아 점심엔 파리크라상 같은 체인형 브런치 카페, 저녁엔 이자카야·와인바로 발길을 돌렸다.
영국에서 귀국한 후 2005년에 처음 문을 연 서울 서래마을 '키친플로'에 이어 가스트로펍을 표방한 '쉐플로' 도곡점에 이어 낸 '쉐플로' 신사점 모습. 지금의 '치즈플로'로 이어졌다. [사진 조장현]
미국에서도 값비싼 파인 다이닝 대신 술집처럼 가벼운 가스트로펍이 유행했다. 뉴욕의 유명 가스트로펍을 둘러본 후 2010년 집 담보 대출 받아 서울 도곡동에 가스트로펍 '쉐플로'를 냈다. '키친플로'를 아예 접고 신사점을 추가로 낼 정도로 또 대박이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외식 트렌드를 좇기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준비하고 싶었다. 그게 치즈였다. 문제는 너무 어려웠다.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든 재료로 요리하는 아티장 푸드를 초기부터 표방했기에 아이스크림·빵·초콜릿에 베이컨·햄까지 다 만들었다. 그런데 치즈만은 번번이 실패였다. 2013년 뉴질랜드 치즈스쿨 단기유학 후에야 쉐플로 신사점 주방에서 성공했다. 잘 만든 건 아니고 그저 만들 줄 아는 정도였는데, 2016년 겁 없이 레스토랑과 치즈 공방을 한 공간에 둔 치즈 전문 레스토랑(치즈플로)까지 냈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방향이 보이면 일단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 저지른 일이었다. 2019년 프랑스에서 다시 배워온 후엔 '치즈플로'만 남겨 치즈에 집중했다. 짧아도 이틀, 길게는 수개월 걸리는 치즈를 직접 만들어 요리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기술은 차치하고, 원유 쿼터제 탓에 식품 대기업이나 목장주 아니면 우유를 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매출은 부진한데 주거래은행 대출까지 막혔다.
조장현 셰프가 서울 한남동 '치즈플로'에서 손수 만든 브리 치즈(왼쪽)와 서울신라호텔에 납품했던 트리플크림브리 치즈. 두 치즈 모두 완성까지 2주가 걸린다. 전민규 기자
서울 한남동 '치즈플로'의 치즈 공방에서 만들고 있는 크로틴 치즈(크로틴 드 이태원). 완성까지 10일 걸린다. 전민규 기자
벼랑 끝에 섰을 때 운 좋게 유명 TV 프로그램 '수요미식회'가 알아봐 줬고, 2022년엔 최고급 수입 치즈만 쓰던 서울신라호텔 프렌치 레스토랑 '콘티넨탈'에서 시즌 메뉴에 쓴다며 트리플크림브리를 주문해왔다. 한 번에 300개 정도, 기간은 1년 남짓이라 매출은 크지 않았지만 최고급 호텔 납품의 꿈이 현실이 되면서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학벌과 직업이 기득권이던 시절,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왜 어려운 길을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이젠 답할 수 있다. 안 가본 길에 대한 후회를 남기는 대신 나란 인간이 누구인지, 그 본질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화려한 꽃길은커녕 당장은 별 볼 일 없어도 내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지 그 본질을 찾아야 자기가 주도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그 옷이 내겐 치즈였다.
안혜리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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