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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조상열 소방경이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현장대응’ 역량 부족한 지휘관들

“30년을 화재 현장에서 일했지만, 아직도 작전을 수행할 때는 공포심이 생깁니다.”

32년차 베테랑 소방관 조상열 소방경(59)의 말이다. 30년 넘게 무수한 화재 현장을 누볐지만 지휘관으로 현장에 투입될 때의 압박감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다고 했다.

조 소방경은 “순직 사고의 일차적인 원인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위험요소에서 온다”면서 그러므로 지휘관들이 더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는 119안전센터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평택·제주·문경 순직사고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지휘관의 경험이 많고 지식이 풍부하면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라며 “하지만 지휘관들은 현장을 잘 알지 못해 소방관 순직 사고가 날 때마다 지휘 문제가 불거진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소방청이 그간 내놓은 ‘소방관 순직사고 조사 보고서’에는 ‘지휘관의 역량 부족’에 대한 지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경북 문경 공장 화재(2024년 1월31일)에서는 현장 지휘관이 내부 화재확산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고, 실내 투입 대원들이 필수적으로 휴대해야 하는 관창(소방호스에 연결해 화재를 진압하는 기구)을 들고 진입할 것을 지시하지 않았다. 관창도 없이 안으로 진입한 대원 중 2명은 급격한 연소확대로 고립돼 숨졌다.

제주 창고 화재(2023년 12월1일)에서는 선착대장이 대원안전 위협요소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고, 현장 위험성 평가 등 지휘활동이 부족했다. 처마 밑에서 진압활동을 하던 대원 1명은 낙하한 구조물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전북 김제 단독주택 화재(2023년 3월6일)에서는 선착대장이 상황을 판단한 뒤 해야 하는 지휘선언, 대응 우선순위 결정, 대원 고립 시 긴급탈출 지시 등의 지휘활동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빨리 사람을 구하라”는 주민들의 성화에 홀로 주택에 진입한 대원은 다시 나오지 못했다.

경기 평택 신축공사장 화재(2022년 1월5일)에서는 ‘폭발적인 화재 이상현상’(일정 공간 전체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는 현상인 불길 급속확산의 일종)에 대한 징후가 발견됐음에도 지휘관의 대응이 없었다. 폭발성 화재에 휩쓸린 대원 중 3명은 목숨을 잃었다.

경기 이천 물류창고 화재(2021년 6월17일)에서는 복잡한 내부구조, 다수의 가연물 등을 고려할 때 진입을 최소화하고 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방어적 전략이 고려돼야 했지만, 지휘관은 내부 투입을 지시했다. 다량의 내부 가연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리면서 구조대원들을 덮쳤고 1명이 고립돼 숨졌다.

이처럼 소방관 순직과 지휘관 역량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현장 지휘 역량을 기르기 위한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장 지휘를 하는 간부급 소방관들은 지휘역량, 현장 안전관리, 화재대응, 구조 등으로 이뤄진 집합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그러나 ‘경상북도 문경시 공장 화재현장 순직사고 사고조사단 조사·분석결과’ 보고서를 보면 화재 당시 현장지휘관과 현장안전담당관은 소방위 승진 전후로 사이버교육만 각각 3회, 2회 들었다. 모여서 수업을 듣고 실습도 하는 집합 교육은 전혀 이수하지 않았다.

소방청 자료를 보면 초급간부인 소방위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기본교육 이수율은 2023년 기준 전국 평균 18.9%에 불과했다. 상위 계급으로 범위를 넓혀봐도 소방경 40.2%, 소방령 49.3%, 소방정 36.5% 등 이수율은 소방정 이하 전 계급에서 절반을 넘지 못했다.

지휘 문제에서 기인한 순직사고가 반복되자 소방청은 2021년 ‘지휘관 자격인증제’를 도입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재난 현장에서의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해 초급·중급·고급 지휘관으로 나눠 각 역할에 맞는 역량을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소방청 자료를 보면 지휘관 자격인증제 교육 이수율은 2023년 기준 전국 평균 4.9%에 불과하다.

지휘관의 역량 부족은 현장 대원들의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박남수 경기소방지부 노동안전위원장은 “올 1월에도 현장 지휘관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 현장 근무에 투입된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소방관이 다치는 일이 있었다”면서 “당시 지붕에 대원들을 올려보내면 안 된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이 무리한 지시를 해 발생한 사고”라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지휘관이 현장을 모르면 현장 대원들의 판단과 상반되는 지휘를 내리거나, 대원들이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라고 강조했다.

정용우 ‘소방을 사랑하는 공무원 노동조합’ 경기본부 위원장은 “지휘관의 현장 경험 부족으로 인해 젊은 현장 대원들이 지휘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소방관의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조 소방경은 지휘관의 지휘 역량 부족 문제는 기형적인 소방 조직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본부나 서 단위에서 내근을 해야만 승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현장 근무를 기피한다”라며 “119안전센터 등 현장에서 화재 진압을 열심히 하는 지휘관들은 승진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지휘관 교육을 이수하지 않아도 큰 페널티가 없으니 교육을 제대로 받는 사람이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소방 전문가들은 현장을 경시하는 조직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손원배 초당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현재 한국 소방은 내근 중심, 간부후보생 중심으로 조직이 운영되다 보니 현장 상황 판단 능력이 부족한 지휘관이 현장을 지휘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라며 “수사 경찰이 다년간 실적을 내면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경찰 조직처럼 소방에서도 현장 경력을 쌓은 소방관들을 지휘관으로 등용해야 한다”라고 했다.

화재 현장에 대원을 투입시키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 소방경은 “사람이 없거나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현장에 대한 대응 매뉴얼이 없다보니 지휘관들은 계속 대원들을 투입시키게 된다”라며 “현장에서 단순하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대원 투입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것이 대원도 보호하고 지휘관도 보호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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