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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소개팅 ‘우리 처음 만나’ 현장
‘소소한 소통’ 주최… 19명 참여
“삶의 기쁨 바라고 누릴 수 있는 똑같은 존재로 봐줬으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조영민(24)씨와 오채림(24)씨. 영민씨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젯밤 다 샜어요. 진짜 진짜 떨려서 다 샜어요.”

소개팅 자리에 나온 영민(24)씨는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에 전날 밤 한숨도 자지 못잤다고 했다. 상대에게 단정한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 아침 일찍부터 옷도 고르고 머리도 만졌다. 까만 카라티 위에 회색 체크 자켓을 걸친 영민씨는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소개팅 장소에 들어섰다.

지난 11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의 한 커피숍에는 발달장애인 남녀 19명이 소개팅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가 오랜만이라, 대부분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조심스레 인사를 나누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갔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정보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 ‘소소한소통’은 이날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발달장애인 소개팅 프로그램 ‘우리 처음 만나’를 진행했다. 지난달 12~24일 온라인 신청을 받은 결과 모두 58명이 지원해 3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을 보였다.

소소한소통 백정연 대표는 행사 시작에 앞서 “지난번 소개팅이 끝나고 정말 많은 분들이 언제 또 진행하냐고 물었다. 그만큼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기회가 없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만남의 장을 한 번 더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소개팅 행사에 참여한 이들이 테이블에 둘러 앉아 진행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연애가 처음인 사람을 위해

첫 시작은 소소한소통에서 제작한 발달장애인 대상 연애 참고서 ‘쉽지’를 기반으로 연애의 의미를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소개팅에 참여한 이들은 행사 전 받은 쉽지 책과 활동지를 보며 매너 좋게 대화하는 법, 대화를 시작하는 법 등을 익혔다.

서투른 글씨체로 '나를 알아보는 질문'에 답변을 채워나간 홍진기(42)씨.


다음 순서는 활동지 속 질문에 답을 적으며 ‘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진기(42)씨는 서투른 손글씨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나둘 채워나갔다. 좋아하는 것은 노래와 춤, 싫어하는 것은 거짓, 취미는 노래 부르기와 유튜브 보기. 질문 8개에 차례로 답을 다 적은 진기씨는 잠시 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상대에게 본인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는 혼자보다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걸 좋아하고요. 차분한 편인 것 같아요.” 조금은 수줍어하면서도 분명하게 본인을 설명했다. 진기씨 앞에 앉아있던 예빈(24)씨는 그의 말에 집중하며 미소를 지었다. 답변을 다 채운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차근차근 본인을 소개하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이름과 얼굴, 성향 등을 익혔다.

테이블 앞 마주 앉은 두 사람

소개팅에 나온 이들이 가장 기다리던 일대일 대화 순서. 커피숍에는 이들이 대화를 나눌 테이블 8개가 놓였다. 여성 참여자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있으면, 남성 참여자들이 테이블을 옮겨 다니는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한 테이블에 앉은 둘은 정해진 1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이재훈(24)씨와 이야기를 듣는 전수연(34)씨.


“떨리죠? 저도 떨리네요.”

수연(34)씨와 마주 앉은 재훈(24)씨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처음 나누는 대화에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행사 시작 때 모두 함께 읽어본 활동지 속 ‘대화 시작법’을 참고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이제부터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릴게요. 같이 돌아가면서 얘기하면 좋을 거 같아요.”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한 재훈씨. 사는 곳은 어딘지, 취미는 무엇인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부터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 즐겨보는 영화 장르까지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분위기를 올렸다. 잠시 대화거리가 떨어졌다 싶을 땐 휴대전화 속 본인이 키우는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며 어색한 정적을 풀었다. 마침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수연씨도 사진을 보고 웃으며 귀엽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건네는 박예빈(24)씨와 조금 수줍은 모습을 보이는 김명준(29)씨.


“오늘 옷 되게 잘 입으셨다. 제가 그런 스타일을 엄청 좋아해서요.”

옆 테이블에서는 예빈(24)씨가 앞에 앉은 명준(29)씨를 보며 말을 건넸다.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예빈씨는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있다는 명준씨의 말에 호기심과 궁금증을 나타냈다.

“물류센터 엄청 힘드시겠다. 그럼 하루에 몇 시간 일해요?”

“8시간이요.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헉, 저는 3시간밖에 안 하는데. 근데 힘 엄청 좋아 보이세요.”

“아닙니다. 저보다 몸 좋은 사람 많아요(웃음).”

예빈씨의 적극적인 모습에 명준씨는 조금 멋쩍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평소 취미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정보 등을 공유하며 서로에 대해 천천히 알아갔다. 대화 중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공통 관심사라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벼랑 위의 포뇨’, ‘하울의 움직이는 성’, ‘원피스’ 등 만화 제목을 번갈아 언급하며 서로 흥미를 나눴다.

두 시간 동안의 일대일 대화가 끝나고 드디어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대화를 마친 이들은 커피숍 입구에 놓인 투표함으로 나와 마음에 드는 사람 이름과 본인의 연락처를 적은 메모지를 넣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름을 적어 넣는 사람, 복도를 계속 맴돌며 한참을 고민하는 사람 등 투표함 앞에서 보인 모습들은 저마다 달랐다. 고민의 시간 끝에 19명 모두 투표를 완료했다.

김소연(22)씨가 투표함 앞에서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어지는 결과 발표. 소연(22)씨는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 발표 테이블에 앉았다. “소연씨를 선택한 사람이 두 분이나 있어요.” 결과 전달 담당자 이은수씨가 미소 띤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두 명이나 저를 선택했다니.” 뜻밖의 결과에 깜짝 놀란 소연씨는 놀란 목소리로 반응했다. 이어 본인의 전화번호를 두 남성에게 전달해도 되는지 묻는 담당자에게 줘도 된다며 흔쾌히 승낙했다. 비록 소연씨가 선택한 참여자는 다른 이를 선택했지만, 두 명의 참여자로부터 관심 표현을 받은 소연씨는 뜻하지 않게 새로운 설렘을 느끼는 듯 했다.

영민씨도 결과를 듣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이어 영민씨가 선택한 상대도 본인에게 표를 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 소개팅에서 서로 동일한 상대를 선택한 경우는 영민씨가 유일했다.

“지금 진짜 믿기지 않아요. 이게 꿈이 아니라니.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어요.” 결과 발표가 끝난 후 소개팅이 어땠는지 묻는 질문에 영민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생각지 못한 결과에 연신 “와, 진짜 몰랐어요”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랑’도 하고 ‘사람’도 알고 싶어요

“사실 너무 긴장돼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어요.”

행사가 끝난 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예빈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낯선 사람들에게 곧잘 말을 거는 활달한 성격이지만 새로운 이성과의 대화에서는 긴장을 감추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매번 똑같은 사람만 만나니까, 여기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며 다음에도 비슷한 행사가 있으면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선택받은 이들부터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참가자까지 결과는 저마다 달랐지만, 이들 모두에게 이번 소개팅은 특별한 경험으로 기억됐다. 사람을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고 어울리는 자체가 색다르고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저같이 소외된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별로 겪어보지 못해서 참여하신 다른 분들도 오늘만큼은 특히나 더 설렘을 느꼈을 거 같아요.”

행사가 끝난 후 영민씨는 이렇게 얘기했다. 재훈씨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도 이렇게 잘 소통할 수 있구나’를 깨달았다”며 “대화를 많이 해볼 수 있었던 이 자리가 너무 즐거웠다”고 말했다.

소소한소통 백정연 대표가 소개팅에 참여한 발달장애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소한소통 백정연 대표는 이번 행사가 단순히 만남을 성사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달장애인들이 이성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와 기회를 준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발달장애 현황을 보면 2022년 기준 등록된 발달장애인 수는 모두 26만3000여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장애인의 9.9%로, 2018년 이후 매년 7000~8000명씩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이 사회에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바깥으로 나온다고 해도 평소 본인이 일하는 공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발달장애인 분들이 본인의 삶을 다양하게 채워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현재 정보가 없고 기회가 없어서 못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발달장애인 분들에게 쉬운 정보를 알려드리고, 그 정보들을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회로까지 연결하는 게 저희가 끝까지 해야 할 일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백 대표의 목표는 발달장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삶의 기쁨들이 있잖아요.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연애가 될 수도 있고. 발달장애인 역시 그런 것들을 바라고 누릴 수 있는 똑같은 존재로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처음 만나' 소개팅 행사에 참여한 발달장애인들과 소소한소통 관계자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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