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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시즌3 : 애도] <번외편>고선규 박사의 조언
“머리와 마음 사이 시차가 큰 죽음, 자살
죄책감 대신 자기 연민ㆍ위로 해주길”
“상실이 약점 되지 않는 공동체였으면”
고선규 한국심리학회 자살예방분과 위원장은 "’애도’는 자살 사별 경험을 풀어내는 인터뷰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라고 말했다. 정다빈 기자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죽음. 사랑하는 사람을 자살로 잃고 난 뒤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다.

임상심리학자이자 애도상담 전문가인 고선규 박사는
“자살 사별은 그래서 머리와 마음
사이에 ‘시차’가 큰 죽음”
이라고 말한다. 자살 사별자(suicide survivor)들이 고인의 죽음 이후 시간이 멈춰버리는 듯한 경험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이런 충격적인 사별은 자연스러운 애도를 가로막는다”며 “남겨진 이들은 고인의 죽음에 묶여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이어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이 많은 연구들에서 관찰됐다”고 덧붙였다. 애도가 지연된다는 얘기다. 참사나 범죄 같은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한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 죽음에 사로잡혀 애도를 미룰 수도 없다. 고 박사는 “냉장고에 냉동된 듯한 상태로는 이후의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이어나가기 힘들다”며 “당장은 치워놓을 수 있어도 언젠가는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애도의 과정에 들어가는 시간이 오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애도’ 1회에 출연한 소설가 정진영 작가 역시 어머니의 죽음을 13년간 ‘마음의 벽장’ 속에 가둬놨었다. 그간 회피했던 어머니의 일기장들을 읽어본 게 ‘애도’의 출발이었다. 정 작가는 일기장 속에서 자신이 몰랐던 어머니를 발견하곤 어머니가 아닌 김옥순이라는 한 여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고 박사는 “정 작가가 어머니의 삶을 마치 심리부검하듯 탐색하고 이를 소설로 쓴 뒤 출간하는 과정을 보면서 애도에 필요한 절차가 다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심리부검은 자살로 사망한 고인과 관련된 자료를 살피거나 가족·지인을 만나 마음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작업을 뜻한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자살 사별을 경험했다면 어떻게 하는 게 도움이 될까. 고 박사는 “되레 특별한 말이나 행동을 하기보다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게 가장 필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마음이 요동치는 애도의 과정을 잘 버텨주기 바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얘기다.

한국심리학회 자살예방분과 위원장이기도 한 고 박사는 한국일보 버티컬콘텐츠 ‘애도’를 자문하고 있다. 고 박사의 조언이 담긴 인터뷰는 ‘애도’ 버티컬 페이지와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무엇으로든 표현하면 숨이 쉬어진다

고선규 박사는 2018년부터 자살 사별자들의 애도상담을 하고 있다. 2030 여성 자살 사별자 자조모임 ‘메리골드’를 이끌고 있기도 하다. 정다빈 기자


-‘지연된 애도’란 무엇인가.


“상실 경험 중 가장 힘든 것이 죽음이다. 죽음 이후 장례라는 의례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애도의 과정에 들어가게 마련인데, 그렇지 못한 죽음도 있다. 재난이나 범죄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 등이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고인이 떠났는데도 그와 딱 붙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치 냉동된 듯한 상태로는 이후의 삶도 건강하게 이어나가기 힘들다.
당장은 치워놔도 언젠가는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죽음을 인정해야 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걸 넘어서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불가해한 죽음에 맞닥뜨리면 심정적으로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애도상담을 하면서 만난 이들이 그래서 ‘비현실감’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쓴다. 살면서 겪어봤던 감정이 아닌 거다. 정답은 없지만 죽음의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은 그가 떠나갔다는 걸 이해하는 과정이니까. 정해진 시점은 없다. ‘애도’ 1회의 정진영 작가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3년이 지나 시작하지 않았나.”

-애도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을까.


“자신이 겪은 그 충격적인 경험을 어떻게든 표현해보길 권한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도움이 된다. 글쓰기, 그림, 음악, 말하기, 무용 같은 것들이다.
그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을 토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한 번 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애도상담이나 자조모임을 해보는 것도 좋다.”

◇’그럴 만했다’는 자기연민

고선규 박사는 자살 사별자들에게 "어쩔 수 없었던 그 상황에 있었던 자신을 연민하고 위로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 박사가 지난달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김지은(왼쪽)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가족이 자살로 사망하면 주위에 사인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그런 비율이 높다. 이유는 조금씩 다를 거다.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부닥치면 정말 자기 정신이 자기 정신이 아니게 되기 십상이다. 뭐에 씐 듯 자살이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들 많이 말한다. 게다가 자살이라고 알린다고 해도 누군가 ‘아니, 왜 그러신 거야’라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자신이 그 죽음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할 수 있겠나.
물론 자살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해서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거다. 그러나 ‘사인을 제대로 말했나, 안 했나’보다 그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애도상담이나 자조모임에서 만난 자살 사별자들은 어땠나.


“만약 다시 장례를 치르면 이렇게 했을 것 같다고 후회하는 분들도 있다. ‘애도’ 시리즈의 부제처럼, 그런 과정이 아마 뒤늦게나마 ‘마음으로 쓰는 부고’이자, 나만의 장례식일 거다.
중요한 건 ‘당시에 이렇게 했었어야 했다’며 자책하지 않는 것.
개인마다 사별 경험의 맥락은 다르다. 당시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 태도로 스스로를 연민해 주는 게 필요
하다.”

-가까운 사람이 자살 사별을 경험해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 주제로는 하루 종일이라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해진 답은 없다. 많은 자살 사별자들은 실제 ‘순간마다 마음이 다 달라서 어떤 때는 그 말이 정말 위로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상처가 되거나 아무 말도 듣기 싫은 상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는 그저 묵묵히 곁에서 지켜주시라고 한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보다
신뢰 깊은 관계의 사람이 내가 이 시기를 잘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내 옆에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기 때문
이다. 그 마음이 자살 사별자들에게 다 전해진다.”

◇상실이 약점이 되지 않는 사회

고 박사는 "나의 상실을 드러내도 괜찮은 사회, 위로받으며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는 사회, 함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삶의 의미도 되찾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애도는 사회 공동체가 함께해야 하는 여정이다. 정다빈 기자


-‘애도’ 시리즈와 관련해 인상 깊은 점을 꼽는다면.


“댓글이다. 자살 사별자들이 뒤늦게 쓴 부고의 성격인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독자들이 댓글로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하고, 공감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를테면, ‘애도’ 1회엔 이런 댓글들이 달렸다.

“(정진영 작가가 소설에서 엄마에게 뒤늦게 말한) ‘참 잘했어요’는 수십 년간 혜진으로서 숨죽여 살다 간 그리고 수십 리 등·하굣길을 억척스레 걸어 다닌 소녀였던 엄마에게 보내는 눈물임과 동시에 자살 생존자인 자신에게 보내는 용서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기사와 오디오 클립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고 듣는 동안 서사에 감전되어 꼼짝할 수 없었다.”
“담담한 인터뷰이의 목소리에 마음이 더 떨렸다. 담담해지기까지 그의 마음은 몇 번이나 부서졌을까. 아직도 떨리는 마음으로 숨조차 쉬기 어려운 이 땅의 자살 유가족의 이 인터뷰와 그의 자전적 소설이 소통의 불씨가 되기를.”

-이런 댓글을 보고 어땠나.


“댓글 중 마음에 와닿은 단어가
서사와 용서
였다. 정진영 작가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해 완성한 내러티브에 독자들이 서사를 붙여 더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용서라는 메시지를 끄집어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자살 사별을 경험하면 그 죽음에 압도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반추하게 된다. 종국에는 죄책감을 안고 괴로워하는 삶과 내가 이어가고 싶었던 삶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순간엔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탁 놔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게 자기 용서와 자기 연민이다.
독자들이 그걸 읽었다는 게 놀랍다
.


-자살 사별은 사회적 치유가 필요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상실에 슬퍼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따뜻한 사회,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내가 겪은 상실을 은폐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내가 뭔가를 잃었다는 게 나의 약점이 되지 않는 사회
말이다. 나의 상실을 얘기해도 괜찮은 사회, 그랬을 때 사회 구성원들이 손 내밀고 함께 죽음과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자주

‘자살 사별자(Suicide Bereaved)’. 심리적으로 가까운 이를 자살로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살 사별의 아픔이 비단 가족에게 국한되는 일이 아님을 내포한 말이기도 합니다. 자살은 원인을 단정할 수 없는 죽음이라 남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고인을 쉬이 떠나 보내지 못하고 ‘왜’라는 질문에 맴돕니다. 죄책감이나 원망이 들어차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애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입니다. 한국일보는 올해 자살 사별자들의 그 마음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자살 사별자들이 마음으로 쓰는 부고, 애도’입니다.




오디오로 듣기
: ‘자살 사별자들이 마음으로 쓰는 부고-애도’ 시리즈는 오디오 콘텐츠로도 제작됐습니다.
이곳을 클릭하면 오디오 콘텐츠로 이동합니다.
링크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주소창에 다음 주소(https://grief.hankookilbo.com/)를 복사해 붙이면 됩니다.


‘애도’팀은 자살 사별을 경험한 분들의 사연을 받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동료의 자살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신다면 [email protected]으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몇 편을 골라 애도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고선규 임상심리학 박사(한국심리학회 자살예방분과 위원장)의 조언을 전할 예정입니다. 고인을 기리며 쓴 ‘나만의 부고’도 좋습니다. 따로 기사로 정리해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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