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미 물리학회 석학회원인 박문정 포스텍 교수
주말부부로 살며 평일엔 연구·육아 도맡아
“일·가정은 양립 아닌 하나…아이 덕분에 연구 더 잘해”


박문정 포항공대(포스텍) 화학과 교수는 미국 물리학회(APS) 고분자 물리 분과의 차기 회장이다. 미국 대학이 아닌 외국대학 교수가 APS 고분자 물리 분과 회장이 되는 것은 30년 만의 일이다. 박 교수는 고분자 전해질 합성 분석과 고분자 액추에이터(구동기) 같은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2021년에는 APS 회원 중 0.5%에만 주는 석학회원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7일 포항 포스텍에 있는 박 교수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책상에 서류 뭉치가 쌓여 있고 칠판에는 암호 같이 수식이 빽빽하게 적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다. 연구실보다는 평범한 가정집의 거실 같은 분위기였다. 벽에는 박 교수가 쓴 논문이 실린 국제 학술지 표지와 함께 가족 사진이 가득 걸려 있었다. 사무실 한 쪽의 화이트 보드에는 수식 대신 아이가 쓴 ‘김준우는 엄마를 사랑해 정말’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박문정 포스텍 화학과 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고분자 물리 연구자이면서 11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엄마다. 박 교수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며 연구와 육아를 모두 해내고 있다. 그는 "건강한 연구자의 삶을 나중에까지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고 말했다./포항=이종현 기자


박 교수는 사무실은 아이와 함께 지내는 공간이라고 했다. 아들이 침대처럼 쓰는 소파에 앉은 박 교수는 “연구의 80%는 스트레스를 줘 관리하지 않으면 연구자의 인생도 망친다”며 “내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멘탈(정신력)을 잡아주는 게 아이이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덕분에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 교수와 남편은 주말에만 만난다. 남편 직장이 포항에서 가까운 울산이지만, 박 교수는 연구와 업무, 육아 때문에 주말 부부를 택했다. 평일에 아이를 돌보는 건 박 교수의 몫이다. 초등학생인 11살 아들의 등·하교를 책임지고 있다. 이날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박 교수는 “4시에 아이가 하교를 한다”며 틈틈이 시간을 확인했다.

박 교수는 아이가 학원을 다녀오면 함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박 교수는 논문 작업을 하거나 학회 업무를 보고, 아이는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침대처럼 넓은 소파를 둔 것도 아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었다.

출산율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 계획을 밝혔다. 저출생수석 신설도 지시했다. 수석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몸소 체험한 여성을 후보군으로 검토하라고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박 교수야 말로 정부에서 말하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해내는 워킹맘이 아닐까. 하지만 박 교수는 그 표현부터 문제라고 했다.

–출산 문제 해결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면서 일과 가정의 양립이 화두다. 어떻게 둘 다 잘 할 수 있나.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말부터 쓰지 말아야 한다. 양립이라는 건 두 가지가 서로 너무 다를 때 쓰는 표현이다. 나는 일과 가정이 결국 하나의 범주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일에 가정이 포함돼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게 가능한 건 내 일을 아이가 옆에서 지켜보기 때문이다. 새벽마다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 외국인 연구자들과 몇 시간씩 회의하고, 노벨상 수상자와 한 테이블에 앉아 토론하는 모습을 아이가 보는 것만큼 임팩트(효과)가 큰 교육이 없다.”

–일과 양육 양쪽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클 텐데, 어떻게 해결하나.

“예술가처럼 연구도 스트레스가 80%다. 연구가 잘 안 될 때면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진다. 요즘 연구재단에 한창 제안서를 쓰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평가를 받을 때도 있다. 이런 우울감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예전에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 풀었고, 지금도 동료 교수들 중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런다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건 아니다. 그런데 아이와 함께 보드게임을 하고, 캐치볼을 하다 보면 연구로 스트레스가 다 사라진다. 나는 일과 가정이 양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를 잘 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필요하다. 내 주위 여자 동료나 후배 교수들에게 연구 잘하고 싶으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밤새 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낫다. 물론 내 말을 듣고 아이를 낳겠다는 사람은 아직 못 봤다.”

–육아와 연구를 동시에 하는 게 힘들지 않나.

“주위 동료들이 나보고 ‘슈퍼우먼’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육아로 인해 생기는 손실이 많지 않다. 낮 시간을 조금 뺏기는 게 전부다. 학원 보냈다가 다시 데려오고 밥 먹고 하는 시간 정도다. 이렇게 생긴 시간 손해는 늦게 자는 식으로 해결하면 된다. 대부분의 시간은 아이가 함께 사무실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 아이가 학원을 다닐 나이가 되기 전에는 친정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이런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문정 포스텍 교수의 사무실에는 박 교수의 아이가 적어 놓은 낙서들이 있다. 김준우(아들)군이 '엄마를 사랑해 정말'이라고 글을 적어놨다./포항=이종현 기자

–연구와 육아를 모두 잘하는 롤모델이 있었나.

“내가 연구를 시작할 때는 국내에 그런 롤모델이 아예 없었다. 해외에서도 딱히 없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도 성공한 대가 중에 이혼한 사람이 많다. 가정을 제대로 유지하는 게 힘든 일이다. 테뉴어(정년 보장)를 받기 직전에 이혼 당하는 교수도 많다. 그렇게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더라도 가정이 없으면 혼자 쓸쓸하게 살아야 한다. 혼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교내 식당에서 혼자 밥 먹고 그렇게 혼자 지내는 나이 많은 교수들을 국내외에서 많이 봤다. 나는 그런 삶을 사는 게 싫었다.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때 아이가 주는 지지가 엄청나다. 건강한 연구자의 삶을 나중까지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박 교수의 연구 분야는 광범위하다. 고분자의 합성과 구조-물성의 상관 관계를 연구하는데,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이 가능하다. 박 교수 스스로도 “다른 사람이 안 하는 분야를 개척하는 게 자신이 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고분자를 이용한 액추에이터를 만들거나 전고체전지의 이온전도체 등이 박 교수의 손으로 탄생했다. 매번 새로운 연구 분야에 도전하면서도 갓난아기를 초등학생까지 키울 수 있었던 건 학교의 인프라가 아이를 키우는 데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다만 내년부터 1년간 APS 회장직에 집중하기 위해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낼 예정이다. 물론 아이와 함께 간다.

–아이를 낳고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없나.

“2013년에 부교수로 승진하면서 동시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출산하기 한 시간 전까지도 이메일을 확인했다. 당시 연구하던 액추에이터와 관련된 논문이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실릴 예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논문이어서 더 신경을 썼다. 아이를 낳고 5일 만에 실험실에 복귀했는데, 제왕절개가 아니었다면 바로 복귀했을 지도 모른다. 남편이 산후조리원을 예약해서 들어갔는데, 새벽에 몰래 나와서 일을 하다가 산후조리원에서 걸려서 나왔다. 환불도 다 못 받고 나왔는데도 연구실에 가서 일을 할 수 있어서 오히려 기뻤다. 산후조리원 동기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서 포항공항에 갔더니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나만의 육아 원칙이 있다면.

“조건을 달지 않는다. ‘이거 하면 이거 해줄게’라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수학시험에서 90점 받으면 야구 글러브 사주겠다는 말이다. 공부는 공부고, 야구 글러브는 야구 글러브다. 아이가 불합리하게 느끼는 조건을 달지 않는다. 착한 일 스무 번 하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필요한 게 있다면 왜 필요한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하고, 납득이 되면 조건 없이 해준다. 많이 들어주고,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하고 싶은 건 하게 해준다.”

☞박문정 포스텍 교수

서울대 화학생명공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2009년 포스텍 화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주요 연구 성과

Nature Communications(2010), DOI : https://www.nature.com/articles/ncomms1086

Nature Communications(2013), DOI : https://www.nature.com/articles/ncomms3208

ACS Applied Materials and Interfaces(2015), DOI : https://doi.org/10.1021/am5070188

ACS Nano(2019), DOI : https://doi.org/10.1021/acsnano.8b07294

ACS Applied Energy Materials(2021), DOI : https://doi.org/10.1021/acsaem.0c03244

Advanced Materials(2022), DOI : https://doi.org/10.1002/adma.202203413

조선비즈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2123 미끄럼틀에 가위 꽂아 놓은 10대들‥"장난 삼아 범행"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22 [단독] 최태원 모친이 준 예술품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 [최태원·노소영 이혼 2심]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21 '큰싸움 예고' 의협, 수가협상 결렬 뒤 "향후 혼란은 정부 책임"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20 의협, 수가 협상 결렬 뒤 “향후 혼란은 정부 책임”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9 “거부왕 대통령 더 옹졸” “공·사 구분”…윤 대통령 ‘축하 난’ 싸고 입씨름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8 조국혁신당 "축하 난 거부가 옹졸? 거부권 남발이 '옹졸한 정치'"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7 5월 수출 11.7% 증가…대중국 수출 19개월만 ‘최대’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6 “김호중 실형 가능성 높다”…혐의 다 합치면 징역 몇년이길래?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5 조국당 "축하 난 거부가 옹졸? 尹이 쫄보"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4 남북 충돌위기 아슬아슬한데…4·27 판문점선언이 상 받은 이유는?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3 "쓰레기통서 아기 울음소리"…출산 직후 내다 버린 '비정한 친모'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2 이재명 "훈련병 영결식 날 술 타령... 보수 맞나" 尹 비판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1 '개인파산' 홍록기 소유 오피스텔 이어 아파트도 경매 나와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10 홍준표, 노태우·SK 관계 얘기하며…“1.3조 재산분할? 그 정도는 각오해야”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09 ‘파산 선고’ 홍록기, 오피스텔 이어 아파트도 경매행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08 구글·엔비디아와 어깨 나란히...美 타임이 인정한 유일한 ‘한국 기업’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07 조국당 "축하난 거부가 옹졸? '거부왕' 尹이 옹졸·쫄보"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06 "가장 왕성한 구매력"…김난도가 주목한 '영 피프티'의 속살 [비크닉]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05 "사람 죽였다" 경찰에 자수한 뒤 숨진 30대 남성 new 랭크뉴스 2024.06.01
42104 건강보험 의료수가 내년 1.96% 인상‥진료비 상승 전망 new 랭크뉴스 2024.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