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취임 2주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다음 두 장면을 떠올려보자. ‘길에 돈이 떨어져 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고 있다’. 차이가 느껴지는지?

‘돈이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인간의 엄청난 추론 능력 때문이다. 저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돈이 길에 떨어지는 장면을 봤을까? 못 봤다. 본 건 길 위의 돈뿐. 그 돈을 보고 그전에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돈이 떨어졌겠거니 추론한다. 못 본 걸 말하다니 놀랍다. 그에 비해 ‘떨어지고 있다’는 주머니에서 돈 떨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하는 말이니 달리 해석할 게 없다. 시시하다. ‘밥 먹고 있다’ ‘설거지하고 있다’도 마찬가지다. 눈앞에서 그 일이 일어나면 쓸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 이 시시한 표현에 새로운 숨을 후 불어넣었다. “제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 끼쳐드린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한 결사체가 ‘주어 없는 문장’을 즐겨 쓰니, 그건 넘어가자. ‘사과를 드리고 있다’는 말은 시시했던 ‘-고 있다’를 깨어나게 한다.

이를테면, 언제부터 ‘밥을 먹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첫 숟가락이 입에 들어갈 때? 그 밥을 입안에서 씹을 때? 목구멍으로 넘길 때? 아니면 처음 숟가락을 들 때? 그도 아니면 밥상머리에 앉을 때? 그렇다면 ‘아직 먹지 않았지만 먹고 있다’는 놀라운 역설이 성립한다!

그는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사과하는 걸 못 봤는데 ‘사과를 드리고 있다’고 하니 역시 그는 시시한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사과법을 개발한 ‘크리에이티브’다. ‘아직 사과하지 않았지만 사과하고 있다’는 역설! 울분을 가라앉히고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다잡고 컬컬한 목소리를 가다듬는 그 순간도 사과의 표명이다! 그것이 양심의 가책에서 출발한 건 아니겠지만.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겨레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 »»»»» 사과를 ‘드리고 있다’의 역설 [말글살이] 랭크뉴스 2024.05.16
22063 대구은행, 시중은행 전환 인가…32년 만 새 시중은행 탄생 랭크뉴스 2024.05.16
22062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에 ‘우원식’…여 “거부권 제한은 헌법 부정 발상” 랭크뉴스 2024.05.16
22061 불꽃비 쏟아지자 탄성 터졌다…'지옥' 오명 씻은 낙화천국 비결 [르포] 랭크뉴스 2024.05.16
22060 부산법원 앞서 벌어진 유튜버의 칼부림…‘보복살인’ 적용 랭크뉴스 2024.05.16
22059 우원식 선출에 여야 협치 숨통 트일까…巨野 '마이웨이' 할수도 랭크뉴스 2024.05.16
22058 [단독] 오동운 공수처장 후보 딸, 채용공고 없이 로펌서 근무 랭크뉴스 2024.05.16
22057 월매출 26억 대전역 성심당, 월세 1억→4억…“과하다” “지금이 특혜” 랭크뉴스 2024.05.16
22056 홍준표 "총선 말아먹은 애한테 기대겠다는 당에 미래 있겠나" 랭크뉴스 2024.05.16
22055 잃어버린 30년 안 끝났어? 일본 경제 다시 마이너스 성장 랭크뉴스 2024.05.16
22054 우원식 “국회의장, 단순 사회자 아냐…다른 국회 될 것” 랭크뉴스 2024.05.16
22053 [좌담] “언어 장벽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문제”…외국인 과학자 4人에게 한국 과학을 묻다 랭크뉴스 2024.05.16
22052 민주당,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에 우원식 선출, 추미애 꺾고 이변 랭크뉴스 2024.05.16
22051 [영상] 모하비 사막에서 한 달 동안 싸웠다 랭크뉴스 2024.05.16
22050 “대리출석 요청 녹취 있다”…운전자 바꿔치기 소속사 개입 정황 랭크뉴스 2024.05.16
22049 “딸에게 별일 없길 바란다면”…학부모가 교사에게 협박 편지를? [지금뉴스] 랭크뉴스 2024.05.16
22048 인천 교회서 몸에 멍든 여고생 숨져…경찰, 학대 혐의 신도 체포 랭크뉴스 2024.05.16
22047 우원식, ‘명심’ 추미애 꺾었다…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랭크뉴스 2024.05.16
22046 “15층서 사람 떨어지려 한다”…60대 치매 노인 구조 랭크뉴스 2024.05.16
22045 [단독] 이틀 전 서강대교서 투신 시도 여성, 또…경찰에 극적 구조 랭크뉴스 202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