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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9일 서울 원도심 일대. 대기업 사옥 등으로 쓰이는 빌딩들이 밀집해 있다. 뉴스1
경제력 집중 억제 규제를 받는 ‘대기업집단’ 수가 15년새 2배 가까이로 불었다. 한국의 경제규모는 커졌는데, ‘자산 5조원 이상’이라는 규제 편입 기준이 그대로인 탓이다. 반면 한국에서 돈을 버는 외국기업은 규제 사각지대에 놓이면서, 국내 기업만 옭아매는 ‘역차별’이라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1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4년 공시대상기업집단(이하 대기업집단) 지정결과’에 따르면 올해 지정된 대기업집단 수는 88개로 전년보다 6개 늘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와 카지노ㆍ복합리조트 기업 파라다이스 등 7개가 추가됐고, 지난해 한화그룹에 편입된 대우조선해양은 규제망에서 사라졌다.

규제 대상을 선별하는 기준이 현실성을 잃어간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우선 대기업집단 규제 편입 기준은 2009년부터 자산 5조원 이상으로 15년간 고정돼 있다.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GDP)이 2배 가까이로 커졌기 때문에 규제 대상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 대기업집단 수는 2009년 48개에서 올해 88개로 늘었다. 제도가 처음 도입된 1986년(32개)과 비교하면 약 2.8배에 달한다.
차준홍 기자

1986년 제도 도입 당시엔 한국 경제가 해외와 단절된 폐쇄적 구조인 것을 전제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기업은 전세계를 무대로 경쟁하고 있다. 글로벌화한 시장에서 국내 기업 규제는 해외 기업과 비교해 역차별이 된다. 국내 진출 해외 기업에 같은 규제를 가했다간 정치ㆍ외교적 마찰을 불러 올 수 있는 데다, 외국인에게 국내법을 적용하는 건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

국내에서 주로 사업을 하지만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한 쿠팡이 대표적이다. 쿠팡은 2021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됐지만, 공시 의무 등의 책임을 지는 총수로 김 의장 대신 법인이 지정돼 특혜 논란이 일고 있다. 김 의장은 미국 국적이다. 공정위는 지난해까지 “외국인을 총수로 지정할 법적 근거가 불분명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그러다 올해 사람 대신 법인을 총수로 지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사람을 총수로 보든 법인을 총수로 보든 국내 계열사 범위가 동일한 기업집단 등)를 마련했다. 쿠팡 외에 혜택을 받은 국내 기업은 두나무가 유일하다.

제도의 명분인 소수 기업으로 경제력 집중도도 떨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따르면 한국 내 100대 기업의 매출 비중은 2011년 58.1%에서 2020년 45.6%로 12.5%포인트 감소했다. 10대 기업으로 좁혀 보면 같은 기간 26.1%→19.6%로 줄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경제력 집중도도 낮은 편이다. 비교 가능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개 회원국 중 한국은 100대 기업의 매출 비중이 15위로 하위권이었다. 10대 기업을 기준으로 하면 11위였다.

차준홍 기자
신현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한국을 제외하고 다른 국가 중에서 경제력 집중을 이유로 규제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며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감당해야 할 국내 대기업에 대한 역차별로 작용하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승노 자유기업원장은 “대기업집단 제도는 중견기업들의 ‘피터팬 증후군’을 부추기는 문제도 있다”고 비판했다. 자산 규모가 커진 것은 기업이 성장해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긍정적인 신호다. 하지만 경영진 입장에서는 새로 적용되는 각종 규제에 부담을 느껴 자산 5조원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기업집단현황과 주식소유현황, 내부거래현황 등을 공정위에 제출해 공시된다. 또한 계열사간 지원이나 특수관계인간 거래 등이 제한된다.

대기업집단 중 자산이 5조원 이상은 물론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0.5% 이상(올해 10조4000억원)까지 넘으면 상호순환출자ㆍ채무보증 금지 등을 덤으로 적용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대기업집단은 공정거래법을 원용하는 다른 41개 법률의 규제까지 받는다. 한경협에 따르면 대기업집단이 적용받는 규제 수는 274개 이상이다. 정회상 강원대 경학과 교수는 “경제력이 집중되는 과정에서 위법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만 강력하게 규제하면 되지 경제력 집중 자체를 규제할 일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최 원장은 “대기업집단 제도는 이렇게 부작용만 많을 뿐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대표적인 규제로 이제는 서둘러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판이 이어지자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자산 5조원 이상에서 GDP에 연동하는 방향으로 조정을 추진하겠다”며 “GDP의 몇 퍼센트를 기준으로 정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견 수렴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도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한기정 공정위원장은 “총수 일가의 과도한 지배력 확장이나 부당한 내부거래 이슈가 남아 있는 상황이어서 지금 당장 폐기하기는 어렵다”며 “중장기적으로 그런 문제가 자정되는 시점에 본격적인 (규제 폐지) 논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재민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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