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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문화운동의 1세대 임영희 작가
5·18 전후 이야기 담은 <양림동 소녀> 출간
‘임을 위한 행진곡’ 거실 창문 담요로 막고 녹음
송백회·극단 ‘광대’ 활동 등…5.18 때 시민홍보 앞장서
5월 광주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공동체
젊은 세대에게 “‘5월’을 희망차게 알리고 싶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참여와 이후 활동과 관련해 자전적 그림책 <양림동 소녀>를 출간한 임영희 작가가 13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1982년 4월. 임영희 작가는 광주 운암동에 있는 소설가 황석영의 자택에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테이프 ‘넋풀이: 빛의 결혼식’을 녹음하기 위해서다. 테이프에는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사망한 윤상원 열사와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박기순 노동운동가의 영혼결혼식이 담겼다. 맨 마지막 순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었다. 임 작가는 최근 출간한 그의 책 <양림동 소녀>(오월의봄)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이 집(소설가 황석영의 자택)에서 일주일간 같이 지내면서 테이프를 만들었어. 혹시 감시당할까 봐 거실 창문을 담요로 다 막아 놓고 새벽까지 한 거야. 노래를 미리 연습해서 불렀던 게 아니고 그 자리에서 다 같이 배워서 했어. 나는 우리가 처음 불러서 녹음했던 이 노래가 이처럼 전국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많이 불릴 줄은 몰랐어.”

임영희 작가는 광주·전남문화운동의 1세대로 꼽힌다. 1978년 12월 조직된 광주전남 최초의 여성민주화운동단체 송백회의 창립멤버다. 윤한봉, 황석영을 중심으로 광주 지역의 사회운동 세력이 결집해 만든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일했다. 광주YWCA의 연극회인 극단 ‘광대’의 단원으로도 활동했다(5·18 이후 ‘광대’는 ‘갈릴리’로 재결성된다). 이들 단체들은 5·18 당시 각종 문화선전과 시민궐기대회를 주관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에는 권력의 감시망을 피해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문화 활동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지난 13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임 작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탄생하고 알려지기까지 5·18의 진실을 알리려는 광주·전남 문화예술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들은 민중가요를 녹음한 테이프를 팔아 구속된 시민들의 영치금을 마련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5·18을 추모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또 당시 공연을 하려면 광주경찰서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임 작가가 활동한 극단 ‘갈릴리’는 ‘안담살이 이야기’라는 사회비판적 공연을 올리려 했으나 불허됐다. ‘갈릴리’ 다음으로는 김종률 작곡가가 ‘작곡 발표회’를 기획했다. 훗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작곡가는 1979년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자였기에 당시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없었다. “김종률씨가 작곡발표회를 한다고 하니까 경찰서에서 허가를 내줬다. 그러자 서울에서 김민기 씨가 광주로 내려왔고, 우리 집에서 김종률씨와 함께 작곡발표회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었다. 작곡발표회의 주된 내용이 ‘오늘 검은 리본 달았지’와 같은 5·18 내용을 담은 곡들이었다. 또 당시 발표회를 기획한 사람이 훗날 ‘임을 위한 행진곡’ 테이프 제작과 엔지니어링을 도맡은 고 이훈우 전 한겨레 제작국장이었고, 티켓 판매를 담당한 게 송백회였다.” 임 작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바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5·18을 계속 알리려고 노력했던 문화운동 기획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행적 속에서 만들어진 게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고 덧붙였다.

‘양림동 소녀’. 오월의봄


<양림동 소녀>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 진도에서 광주 양림동으로 유학 온 임 작가가 문학소녀였던 청소년기를 거쳐 20대 문화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생애를 글과 그림으로 엮은 구술사다. 2022년 아들 오재형 감독과 함께 80여 점의 그림들로 제작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임 작가는 제목을 ‘양림동 소녀’로 정한 이유에 대해 “양림동은 섬에 살던 내가 처음으로 문화접촉을 했던 곳이다. 또 내가 정치적·사상적인 무장을 한 곳이고,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피어났던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부제는 ‘나의 오월이 시작되는 곳’이다.

책은 5·18을 중심에 두면서 그 이전부터 광주·전남에 뿌리내려온 민주화운동, 문화 운동, 여성운동의 역사를 보여준다. 임 작가가 민주화운동을 했던 주요 토대 중 하나인 송백회는 구속된 사람들을 옥바라지하는 여성들의 소모임으로 출발했다. 이후 공부와 토론 모임, 양심수 지원, 대중 시위, 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 기획 등의 활동을 조직했고 당시 문제가 됐던 일본인들의 성매매 관광, 농촌 여성들의 가난 등에 대해 고민했다. 교사, 간호사, 노동자, 주부, 청년운동가,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 민주화운동 활동가 부인 등 다양한 배경을 지난 80여 명의 여성들로 구성됐다. 임 작가는 “송백회에 가입한다는 것은 경찰에게 감시를 받고 요주의 인물로 지정되는 것을 각오한다는 것을 뜻했다. 당시 건물 입구에는 경찰이 상주하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송백회를 비롯해 많은 여성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임 작가는 “그때 여성들이 어떻게 참여했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여성들도 총을 들고 싸우려고 했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은 군대도 안 갔다 오지 않았냐’라며 못 하게 했다. 그래도 여성들은 5·18의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광주MBC에 화염병을 투척하고, 주요 간부들은 27일 계엄군이 점령할 때까지 생사를 걸고 같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임 작가는 책에서 당시 광주YWCA 건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상황을 전한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끌려가서 사형을 당하거나 여기서 죽겠지 하면서 서로 울먹였지. 그리고 입구에다가 바리케이드를 쳤어. 의자나 뭐 이런 거로. 쳐들어온다는 시간이 다가오니까 남자들은 여자들 나가서 대피하라고 그러고 여자들은 못 나간다, 끝까지 있겠다 하며 실랑이 하고…”

송백회가 구축해온 활동과 네트워크는 5·18 당시 중요한 물적 토대로 작동하기도 한다. 임 작가는 “송백회가 활동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광주YWCA에서 도자기 전시회를 열어 도자기 80점을 팔았는데 그때 돈으로 200만 원 정도 벌었다. 이 돈은 5·18 당시 관을 덮을 천을 사거나 대자보 종이를 사거나 쌀을 사는 데 사용됐다”라고 말했다. 송백회 회원 2명이 광주YWCA 간사로 파견된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다. 임 작가는 “총을 들고 계엄군과 싸우는 제1 항쟁지도부는 전남도청에 있었고, 시민들에게 홍보하고 (도청)분수대 궐기대회를 주관했던 제2 항쟁지도부는 YWCA 건물을 사용했다. 당시 광주YWCA의 어떤 인사는 제2 항쟁지도부에게 건물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기도 했지만, 송백회 회원인 이윤정, 정유아 두 분이 YWCA 간사로 있었기에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참여와 이후 활동과 관련해 자전적 그림책 <양림동 소녀>를 출간한 임영희 작가가 13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서성일 선임기자


책에는 임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수록돼 있다. 5·18 당시를 묘사한 한 그림은 빨간 리본을 머리에 묶은 여성들이 손에 손을 잡고 서 있다. 여성들이 계엄군에 함께 대항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임 작가는 “당시에는 검은 리본을 달았지만, 그림에서는 검은 리본을 쓰고 싶지 않았다. 5·18은 끝난 것이 아니고 그 정신을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빨간색으로 그렸다”라고 말했다. 한편 5월 21일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던 상황을 그린 그림은 그날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전달해준다. 하얀 도청 건물 앞에 분수대는 핏빛 물줄기를 뿜어내고 분수대 앞으로 신발과 팔, 다리 등이 흩어져 있다. 임 작가는 “5·18 기간에 전남도청 건물이 큰 관으로 보였다. 시계탑도 분수대도 도청 건물도 다 증언자다”라고 말했다.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던 80년 5월 21일의 상황을 그린 임영희 작가의 그림. 오월의봄 제공


5·18 이후 임 작가는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로 인해 난소와 유방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 했고 치아가 모두 흔들렸다. 악몽과 불면증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렇지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가까웠던 사람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비참하게 삶을 살았다. 도청에서 총을 들고 있던 시민군들 중 상당수가 송백회 회원의 남편들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상무대에 끌려갔고 아내들은 남편을 면회도 할 수 없었고 폭도로 몰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아기들 업고 나가 행상하면서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내가 아프다고 할 수도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구속자 명단을 지역별로 작성하고 계엄군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병원 기록을 뒤져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 전달했다. 서울로 도피한 기간에는 극단 광대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과 도청 앞 분수대에서 낭독했던 글들을 녹음해 사람들에게 뿌렸다. 광주로 다시 내려와서는 감시를 피하고자 극단 이름을 종교적 색채가 짙은 ‘갈릴리’로 바꾸고 5·18 내용을 담은 <무등의 꿈>이라는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임 작가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경찰에게 끌려가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는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생사를 넘나들며 5·18이 남긴 트라우마 속에 힘겹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1980년 5월 22일 이후를 자신의 생애에 있어 “가장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한다. 계엄군이 잠시 물러갔던 그 날의 광주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공동체였다. “공권력이 사라진 도시에서 시민들끼리 누구 하나 총구녁 겨누며 싸우지 않았고 은행 터는 사람도 없었고. 한 건의 약탈 사건도 없었다. 빈부, 학력, 사회 계층 간 차별도 완전히 무너져 없어졌다. 우리 사이 모든 벽이 다 허물어졌다. 비현실적일 만큼 사람들이 너무나 환희에 차 있었다.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때가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또 영화를 통해서 ‘5월’을 희망차게 알리고 싶었다. 젊은 세대들에게 광주시민들이 만들었던 신성한 공동체,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정신 속에 깃든 민주, 평화, 인권의 가치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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