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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데스크 '제보는 MBC' 코너에서 <크로아티아에서 생긴 일>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크로아티아에 장기 여행을 갔던 한국인 여성이 현지 남성과 연인이 됐다가, 디지털 성범죄와 협박 범죄의 피해자가 된 사건입니다. 피해자는 한국인, 가해자는 크로아티아인, 사건 발생은 두 국가 모두에 걸쳐져 있다 보니 피해자는 한국과 크로아티아 양쪽에서 변호사를 수소문하고 법률 자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변호사를 선임해 사건을 정상적으로 신고 접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크로아티아의 법 체계가 달라, 결론적으로 범죄가 맞는데도 가해자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게 된 황당한 사연이었습니다.

기사가 보도된 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안타까운 반응이 많았지만, 2차 가해성 댓글도 일부 있었습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해당 기사 링크가 올라가자, 오히려 근거 없이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피해자인 은지(가명) 씨가 직접 해명 댓글을 올렸습니다.

- "기사 속 영상은 불법 촬영 영상이다. 동의한 적 없고 소지한 줄도 몰랐다."
- "가해자는 제 가이드가 아니었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좋아한 것도 아니다."
- "귀국 후 한국에서의 만남 계획도 구체적으로 예약하며 사귄 사이다. 제가 그런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 "가해자의 다른 여자친구 역시 이별 후 저보다 더 심한 협박과 스토킹에 시달리고 있어 고소까지 결심이 필요했다."
- "양국에 고소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조치라고 할 수 있는 협조 공문, 수배 요청이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유일한 창구가 언론이었고, 제게는 정말 절박한 상황이기에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피해자인 은지 씨의 법률대리인, 이종혁 변호사는 이번 사건의 본질이 '재외국민에 대한 외교부의 안일한 태도'라는 점을 꼭 지적하고 싶었다며, 보도 이후 MBC 취재진에게 추가 의견서를 보내왔습니다.

[이종혁 변호사]

"해외에 방문하고 있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국가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해외여행 중 외국인으로부터 파렴치한 범행을 당한 국민에 대하여, 그리고 그 범행이 사실상 끝나지 않았음에도 국가가 단 하나의 도움도 주지 못하는 현실과 무관심에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애초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의 범죄에 대하여, 그 수사 한계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한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국가는 가능한 최선을 다해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외국인이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한 범죄는 현실적 수사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는 만큼, 최초 고소장에서부터 각 공관(대사관, 영사, 크로아티아 검찰 등)을 상대로 최소한의 조치라 할 수 있는 '공문발송'만큼은 거듭 부탁드렸습니다.

대한민국이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이라도 알려지게 된다면, 크로아티아 수사기관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고, 가해자에 대한 억지력이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범죄자들에게 수사기관 등 국가 기관이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만일 대한민국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인터폴 적색수배가 내려졌다면, 설령 가해자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볍게 끝나거나 처벌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가해자는 심리적 부담을 안고 영상을 진작에 삭제하고 추가 유포는 꿈꾸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조치 없이, 심지어 '공문발송' 하나도 없었던 탓에, 가해자는 아무런 겁도 먹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더 조롱하고 대한민국의 수사기관도 무시하게 됐습니다."

- 피해자 법률대리인 이종혁 변호사 의견서 -


은지 씨도, 은지 씨 변호사도, 사건을 취재한 저 역시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요. 크로아티아는 한국과 달리 어떤 범행이 발생하면 이를 알게 된 때로부터 '3개월' 이내에 고소해야 한다는 법 규정이 있었습니다. 은지 씨 사건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성착취물 영상을 지인들에게 상영한 사실을 피해자가 알게 된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고소가 됐다"며 크로아티아 수사 당국이 '기간 만료', 불기소 처분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있던 은지 씨는, 크로아티아에서 불법 동영상이 상영됐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어로 된 협박 녹취 음성 등을 번역할 시간이 필요했고, 가해자의 예전 여자친구 역시 똑같은 협박을 당했던 사실을 범행 이후에 알게 된 터라 '가해자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더 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결심해 고소장을 제출했는데, 아예 수사를 하지 않겠다니요. 심지어 불법 동영상이 상영된 현장의 녹음 파일을 전달받은 건 2023년 8월 16일, 피해자가 크로아티아 고소장을 제출한 것은 2023년 11월 24일. "3개월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고작 8일이 지났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짧은 고소기간의 제한이 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사실 크로아티아의 법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결론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2023년 8월 16일에 정확한 범행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전달 받은 현장 녹음파일은 크로아티아어로 되어 있었고, 해당 내용을 번역업체를 통해 다시 전달받기까지 약 10일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가 가해자의 불법영상 상영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게 된 것은 2023년 8월 16일이 아니라 그러한 녹음본의 번역본을 수령한 2023년 8월 26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2023년 11월 24일은 2023년 8월 26일로부터 3개월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므로 적법한 고소가 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검찰은 이러한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쉬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 피해자 법률대리인 이종혁 변호사 의견서 -


게다가 크로아티아 수사 당국은 협박죄에 대해서도 '죄가 아니다'라고 결론 내버렸습니다. 불법 동영상 일부를 피해자에게 보내면서 '내 연락 계속 받아라' 강요하고, '네 인생 각오하라'는 협박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 검찰은 이 정도로는 "피해자의 사회적 평판을 손상시키겠다는 등의 위협적인 겁박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이것 역시 크로아티아와 한국의 법체계, 법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겠죠.
 

"대한민국 법에 따르면, 동영상 촬영물 유포시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 촬영물을 이용해서 협박이나 강요를 할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촬영 당시 동의했던 촬영물까지도 포함하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촬영 당시 동의하지 않았던 동영상이고, 이미 그 촬영물을 지인들에게 유포하거나 상영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국내 수사기관은 설령 가해자가 해외에 있다고 하더라도 발 빠른 형사절차를 밟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한 국가의 수사기관이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는 모습 자체가 가해자에게는 상당한 범죄 억제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 동영상은 한 번 웹사이트에 올라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경찰에 크로아티아 수사기관과 협조해 가해자로부터 영상의 원본을 확보하여 줄 수 있도록 공문이라도 발송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아무런 조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피해자 측에서 직접 이메일과 SNS를 이용해 가해자에게 직접 경고장을 보냈고, 협박 행위를 중단하고 동영상 원본 파일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습니다. 당시 이러한 경고의 효과가 어느 정도 있었는지, 가해자는 며칠 뒤에 피해자에게 영상 원본파일을 전송해 왔고, 피해자는 이 파일을 디지털성범죄센터에 등록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수사기관과 외교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가해자가 갖고 있는 불법 동영상 삭제까지 유도하려 했으나 하필 그 때 즈음 크로아티아 검찰의 불기소 사실이 알려졌고, 가해자는 다시 적반하장으로 피해자를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해자는 크로아티아 수사기관이 자신의 범행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처벌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한민국 영사나 수사기관도 자신에게 아무것도 못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 피해자 법률대리인 이종혁 변호사 의견서-


한국 경찰은 가해자에 대한 체포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외국에 있는 외국인이라 실익이 없다'며 영장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선 영장이 발부되지 않았고 크로아티아에선 수사가 종결됐으니, 인터폴을 통한 국제 공조 요청도 현실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취재가 시작되고 나서 의미 있는 변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외교부가 은지 씨 사건과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입장을 내놨는데요. 주크로아티아 한국대사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안전공지'를 한 겁니다.
 

[외교부 안전공지]

법과 제도에 빈틈이 있고, 그 때문에 범죄 피해자가 또 한 번 절망감을 느끼게 되는 현실. 누구든 해외여행 중에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재발을 막자는 것이 기사의 취지였지만, 피해자를 공격하는 무분별한 악성 댓글은 참담한 현실이었습니다.

은지 씨는 본인 같은 피해자를 막기 위해 용기를 내 제보한 것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가해자는 크로아티아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여행 가이드 일을 하고 있고, 활발하게 SNS 활동을 하며 한국인 여성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로아티아의 법망은 빠져나갔지만, 한국에서는 수사가 '중지'된 것일 뿐 '종료'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의 공소시효는 7년입니다. 은지 씨의 용기가 앞으로 더 많은 범죄를 막고,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거라 믿어 봅니다.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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