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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미국 제조업이 다시 돌아왔다. 시러큐스가 미국의 위대한 복귀 이야기를 쓰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뉴욕주 북쪽 시골 벌판에서 이렇게 외쳤다(조선일보 4월 26일자). 괜한 소리가 아니다. 2년 전 바이든 정부가 공언한 반도체 패권 전략은 텍사스와 애리조나 오지에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막대한 보조금과 주정부의 후원을 받은 삼성과 TSMC가 첨단공장 가동을 앞두고 있다. D램 생산 3위 업체 마이크론은 뉴욕주와 아이다호에 172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패권에 시동을 걸었다. 이로써 미국은 2~3년 내에 파운드리(위탁생산), 패키징(조립), D램 생산에서 주도권을 거머쥘 것이다.

미국·일본 속전속결 반도체 굴기
느릿한 한국의 반도체 공장 설립
역사적·인류학적 땅이라 어려움
국회와 정치권이 난관 뚫어줘야

D램 최강자 한국이 40년 전 반도체에 눈을 뜬 것은 요행이었을까. 우주항공, 자율주행차, 군사 장비, 그리고 AI가 반도체를 먹는 향유고래임을 알았을까. 어떤 기업가의 미래예견 촉과 결단이 21세기 한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D램 세계 공급 70%, 한국 GDP 20%를 점유하는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한국의 경제 엔진이자 최고의 안보 산업이다. 북한 김정은이라면 탄도미사일과 장사포를 다섯 지역에 맞춰 놓았을 것이다. 평택(삼성), 이천과 청주(SK), 포항(포스코), 창원(우주항공과 군수산업). 여기에 이스라엘처럼 아이언돔을 설치해야 할 정도다.

한국의 대표적 재벌 공장에 아이언돔을 설치하자고 했다간 욕설 댓글이 폭주할 것이다. 그건 일단 접어두고, 반도체 전쟁의 최전선은 어떠한가. 물량 공세가 핵심인 요즘 공장 설립에 우선 주목해보자. 동작이 한량없이 굼뜬 미국도 공장 준공에 불과 2년 남짓 걸렸다. 일본 역시 반도체 전쟁에 뛰어든 지 2년 만에 구마모토 TSMC 공장을 가동했다. 우리는 길다. 길어도 너무 길다. 삼성 평택공장은 10년이 걸렸고, SK하이닉스 용인공장은 8년이 걸릴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목숨을 걸었고, 미국은 밀어붙였다. 특히 미국의 환경은 속전속결에 딱 맞는다.

170억 달러가 투입될 텍사스 삼성전자 부지 소유자는 불과 두어 명이다. 게다가 광활한 옥수수밭이라 불도저로 밀면 끝이다. 주정부가 물과 전기를 대준단다. 설비만 갖추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한국은? 용인 원삼면 일대가 반도체 단지로 결정된 지 3년 만에 첫 삽을 떴다. 문화재청이 발굴작업을 끝내고 그곳 땅 주인 1100명을 설득하고, 1500기 무덤 이장을 논의하는 데에 그만한 세월이 걸렸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어찌 쉽게 떠날 수 있겠는가. 산이 70%인 좁은 국토에 몰려 사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예전 수몰지구가 그랬다. 작가 한승원이 쓴 『물에 잠긴 아버지』의 주인공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일대가 댐 건설로 물에 잠기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잡역부로 일한다. 다시는 고향을 찾지 못한다. 조상을 수장시킨 죄. 동성 부락이 많고 제실과 제답이 널린 한국의 땅은 역사적이고 인류학적이다.

그런 내력을 눈물로 접고 이주를 수락한 용인 원삼면 주민들의 결의가 한국의 미래를 살렸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삶의 기반을 다시 닦고 있다. 묘지 이장엔 온갖 정성을 들였다. 공장부지 60만 평 내에 해주 오(吳)씨 종친회 땅이 6.3만 평 있었다. 종친회 회장 오수환씨가 종중을 설득했다. 한국의 미래와 후손을 위해 땅의 수용을 허락하자고. 1만 평 이상을 소유한 여덟 문중이 모두 뒤를 따랐다.

반도체 생산에는 물과 전기가 절대적이다. 철강보다 더 많은 물과 전기를 먹는다. 미국 텍사스에는 불도저가 땅을 고르는 동시에 배관을 묻어 물과 전기를 끌어오면 끝이다. 한국은? 한도 없이 복잡하다. 남한강 수원지인 여주 주민을 달래야 한다. 여주는 춘천과 유사하다. 수도권 물관리를 도맡아 하느라 고도 제한에 오염시설 입주 금지다. 돈 되는 시설은 없고 남의 돈 벌어주는 일에 매진해도 보상은 없다. 그러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전기도 마찬가지다. 안성에서 끌어오는 한전 전기를 땅밑 100여m 배관을 통해 용인까지 송전해야 한다. 배관이 통과하는 마을들이 들끓는데 정부는 규제조항만 들여다본다. 보상 민원은 지역마다 제각각이어서 해당 기업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용인 클러스터는 2027년 5월에야 완성될 예정이다. 몇 달 전 첫 삽을 뜬 세계 3위 업체 마이크론 아이다호 공장은 2026년, 뉴욕주 공장은 2028년에 가동한단다.

한국은 이렇게 악전고투하며 먹고 산다. 기업과 주민은 그래도 한마음인데 정부는? 터 닦고 첫 삽을 뜰 때까지 정부는 미온적이었다. 정쟁에 휘말려 뭘 할 수도 없었다. 적극적으로 나서면 특혜 비난에 특별감사 대상이 될 위험에 처한다. 삼성전자는 지난 8년간 정치권의 준엄한 사열을 받았다. 얼마 전 모조리 무죄가 선고됐다. 반도체 굴기를 외치는 미국과 일본에는 정부가 추진력을 뽐내고 있는데 한국의 최전선에는 감시의 눈초리가 번득인다.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며칠 전 던진 질문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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