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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예술을 보러 가다’
감독 가와우치 아리오 인터뷰
전맹의 미술관람자에서 사진 작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허물고 ‘자유’를 보여줘
시라토리 겐지(가운데)와 가와우치 아리오(오른쪽)이 시오야 로타의 ‘태도’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작품을 ‘바지락’ ‘바다코끼리’ 등으로 묘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거 바지락 같지 않아?”

“으음, 바다코끼리? 한참 수영한 바다코끼리가 ‘아 힘들다’ 하는 느낌이야.”

미술관에서 이런 대화가 들린다면? 어린이들이 나누는 대화일까? 틀렸다. 다 큰 어른들이 ‘진지하게’ 나누는 대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 미술관을 찾은 가와우치 아리오, 마이티의 대화다. 눈이 보이는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시라토리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한다. 작품은 시오야 로타의 대형 조각 작품 ‘태도’다. 이들의 대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른 그림을 보며 “오징어 같다” “꽁치 같다”는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겠지만,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만든 ‘대화형 미술 감상법’과 유사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에 나오는 장면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느낄 수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미술을 관람한다고? 저렇게 마음대로 작품을 감상한다고? ‘충격’은 곧 해방감으로 바뀐다. ‘본다는 것’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에 대한 기존 관념을 해체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보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들을 다양하게 생각하게끔 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영화가 끝나고 비로소 나의 사고가 시작되는 계기를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예술을 보러 가다>의 가와우치 아리오 감독이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지난달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가와우치 아리오 감독이 말했다. 가와우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를 책으로 펴낸데 이어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선 영화 상영과 함께 아티스트 토크가 이뤄졌다. 관객들은 넓은 상영관을 가득 채우고 자리가 모자라 좌석 사이 복도 바닥에 앉아 영화를 관람했다. 아티스트 토크가 끝난 후 가와우치를 인터뷰했다.

시라토리는 전맹이다. 약한 시력을 타고난 그는 중학교 시절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대학생 때 미술관으로 데이트를 가게 되면서 미술에 ‘눈을 떴다.’ 전시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인체해부도 특별전’. 호감 가는 여성이 설명해 주는 다빈치의 인체해부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맹인 나도 그림을 즐길 수 있을까”란 생각을 품게 됐다. 그 뒤로 미술관 문을 두드렸고, 수없는 거절 끝에 그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는 미술관이 나타나면서 ‘전맹의 미술관람자’로의 여정이 시작됐다. 가와우치 감독은 그 여정의 기꺼운 동참자다.

다큐멘터리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예술을 보러 가다>의 한 장면. 가운데가 시라토리 겐지, 오른쪽이 가와우치 아리오 감독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자유

“시라토리를 만나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게 되었어요.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를 느끼며 자유롭게 바뀌었죠. 미술을 감상하는 방식 뿐 아니라 삶의 방식까지도 바뀌었어요. ‘이렇게 자유롭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를 느꼈죠.”

영화는 시각장애, 미술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유’에 관한 이야기다. 시라토리는 전맹이지만 미술관에 간다. 미술을 관람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를 허문다. 시라토리는 “미술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미술관을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같은 작품을 두고도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충돌하는 과정을 즐긴다. ‘보이는 것’이 자명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 결핍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가와우치 감독은 “같은 걸 보고 같은 느낌이나 생각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게 자연스럽고 평범한 것이라는 걸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예술을 보러 가다>의 한 장면.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장애

상영회를 찾은 관객 대부분이 책을 읽은 이들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책을 읽는 내내 상상했던 시라토리의 모습을 시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라토리가 ‘말’을 통해 미술 작품을 머릿속에 상상하는 것과 반대되는 과정인 셈이다. 책과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것이 ‘본다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의 일부로 느껴져 흥미로웠다.

영화에선 시라토리의 일상이 좀 더 부각된다. 초고속으로 재생되는 뉴스를 듣고, 하얀 지팡이와 함께 거침없이 길을 걷는다. 혼자서 국수도 맛깔스레 말아먹는다. 독립적인 모습과 동시에 타인에게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받는 시라토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마트에서 장을 보기 위해 안내를 요청하고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국수에 들어갈 식재료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시라토리를 특별히 자립적으로 담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담고 싶었죠. 장애인들은 여러 곳의 도움을 받고 의지하면서 자립할 수 있습니다. 비단 장애인 뿐 아니라 우리 모두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고 받으면서 인간으로서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큐멘터리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예술을 보러 가다> 포스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예술이 삶을 바꾼다

시라토리는 안마사에서 ‘전맹 미술관람자’로 바뀌었다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예술가로 변화한다. 일본 지역 미술관에 시라토리의 방을 그대로 옮긴 ‘겐지의 방’을 설치하고 40만 장의 사진을 볼 수 있게 했다. 시라토리는 그 방에서 상주하며 관람객과 만나는 전시를 진행했다. 그 이후 시라토리는 사진작가, 예술가로 거듭났다. 상영회가 열린 4월에도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었다.

“시라토리는 아마 엄청 행복할 거예요. ‘겐지의 방’ 전시가 계기가 돼 여러 곳에서 사진을 발표할 기회가 생겼어요. 사람과 예술의 만남으로 새로운 문을 여는 순간이 됐다고 생각해요.”

가와우치 감독에게도 ‘새로운 문’이 열렸다. 친구였던 다이스케 미요시에게 부탁해 시라토리를 영상으로 찍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영화까지 만들게 됐다. 영화는 가와우치와 다이스케의 공동 연출로 만들어졌다. “시라토리를 만나 바뀌어가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어떻게 변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죠.”

다큐멘터리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예술을 보러 가다>의 한 장면.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아직은 시각장애인에게 먼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은 시각장애인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늘상 수요가 있는 건 아니어서 신청자가 사전 예약을 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신청자는 단 세 명. 시각장애인이 미술관을 찾고, 설명까지 요청한다는 인식이 아직은 자리잡지 않았다.

정상연 학예연구사는 “올해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려고 한다. 현재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발달장애인을 위한 도슨트 프로그램도 현재 준비 중으로, 이달 말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술관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프로그램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영화 다섯 편 중 하나로 상영됐다. 영화는 오는 9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다시 상영회를 갖는다. 부산현대미술관과 울산시립미술관에서도 상영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11월 서울 베리어프리 영화제에서도 상영된다.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예술을 보러 가다>의 공동감독 가와우치 아리오(오른쪽)와 다이스케 미요시. 정지윤 선임기자


[기자칼럼]보지 못하는 화가와 미술관람자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가능할까. 시각장애인이 미술을 감상하는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미술관에도 점자로 된 안내문 등이 제공되며 시각장애인의 전시...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1222015001

[책에서 건진 문단]‘전맹의 미술관람자’ 시라토리···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미술 담당을 할 때인 2021년 9월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란 전시 기사를 썼습니다. 발달 장애와 정신 장애 작가 16인의 작품을 모았습니다. “독자적...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10210600001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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