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남 화순군이 지난 4월30일 능주초등학교에 설치된 ‘정율성 흉상’을 철거했다. 흉상이 사라지고 정율성 출생·사망 년도가 적힌 조형물만 지난 9일 남겨져 있다. 고귀한 기자


“훌륭한 우리 학교 선배라던데. 왜 없앤 거예요?.”

지난 9일 오전 전남 화순군 능주초등학교에서 만난 한 학생은 교정 한쪽에 있는 정율성 선생 흉상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있던 정율성 흉상은 뿌리째 뽑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흉상이 있던 자리는 새 보도블록이 깔렸다. 주변에는 ‘1914-1976(정율성 출생·사망 년도)’라고 적힌 녹 슨 철골 조형물과 그의 이력이 적힌 패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13일 능주초·화순교육지원청 등에 따르면 항일 무장단체 출신 중국 음악가인 정율성을 기리기 위해 능주초에 조성된 흉상과 기념교실이 지난달 말 철거됐다.

정율성 흉상은 1908년 10월 능주육영 보통학교로 설립된 능주초가 100주년을 맞은 2008년 세워졌다. 정율성은 유년 시절인 1917년부터 1923년까지 화순군 능주면에 거주하며 2학년까지 능주초를 다녔다.

당시 화순군은 2000만원을 능주초에 지원하며 흉상 건립을 제안했다. 정율성이 태어나거나 거쳐 간 광주와 화순에서는 중국 관광객 유치 사업의 목적으로 그의 이름을 딴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하던 때였다.

화순군은 흉상 건립에 이어 2015년 9월 예산 8000만원을 들여 능주초에 정율성이 다녔던 옛 교실을 그대로 재현한 ‘기념교실’도 만들었다. 2017년에도 1억원을 투입해 흉상 주변을 정비하고 능주초 외벽에 정율성 초상화와 유년 시절 모습을 타일로 조각했다.

능주초는 정율성이 거주했던 인근 생가(전시관)와 함께 ‘정율성 투어 명소’로 주목받았다. 능주초는 ‘능주초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라고 그를 소개하며 관련 교육도 진행했다.

정율성 흉상이 철거된 전남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교정에서 9일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고귀한 기자


정율성이 골칫거리로 전락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다. 당시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은 북한군을 위해 활동한 전력 등 정율성의 이력을 문제 삼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쓰거나 발언을 하면서 이념 논쟁을 부추겼다.

‘기념사업을 중단하고 시설을 철거하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화순교육지원청 관계자는 “논란 이후 능주초에 매일 항의성 전화가 빗발치고, 보수 유튜버가 찾아오며 수업을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능주초와 화순교육지원청은 ‘정율성 논란’에 학교가 휩싸여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화순군에 대책 마련을 요청했고, 화순군은 결국 능주초 총동문회 등과 협의를 거친 뒤 지난달 30일 정율성 흉상과 기념교실을 각각 철거했다. 조만간 외벽에 있는 타일 벽화를 제거하고 생가 내 전시관도 철거할 예정이다.

학생들 대부분은 흉상이 없어진 것에 갸우뚱거리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5학년 한 학생은 “무슨 북한 논란이라고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린 뒤 “이따 선생님께 여쭤봐야겠다”라고 말했다.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 황모씨(64)는 “이념이 다르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한 사람 인생 전체를 공산당으로 매도하면 110년이 훌쩍 넘은 그 학교의 역사 명예는 어떻게 되고 또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능주초 관계자는 “정율성 관련 교육은 지난해부터 하지 않고 있다”면서 “아이들과 학교가 더는 논란에 휩싸이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밝혔다.

전남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외벽에 있는 정율성 벽화. 고귀한 기자

경향신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0347 '재산 420조' UAE 대통령 방한…한국 투자 보따리 어디에 풀까? 랭크뉴스 2024.05.23
20346 고금리 끝낼 기미 없는 美 연준…의사록서 “예상보다 오래 금리 유지” 랭크뉴스 2024.05.23
20345 머리다쳐 꿰매도 보험금 '0원'…수슬보험금 기준은? 랭크뉴스 2024.05.23
20344 엔비디아 1분기 호실적… 젠슨 황 "블랙웰 본격 생산중" 랭크뉴스 2024.05.23
20343 美 엔비디아 "차세대 산업혁명 시작"…시간외주가 1천달러 돌파(종합2보) 랭크뉴스 2024.05.23
20342 “부산 와서 얘기해라”… 뉴스 악플에 맞선 사랑꾼 남편 랭크뉴스 2024.05.23
20341 “국방부 이첩보류 명령은 월권…기록 회수는 경찰수사 방해” 랭크뉴스 2024.05.23
20340 [단독] FIFA에도 없는 축구협회장 출마 연령 제한... 정몽규 회장 연임 위한 꼼수? 랭크뉴스 2024.05.23
20339 김호중 영장심사에도 공연 강행...15만 팬덤 무너질까 랭크뉴스 2024.05.23
20338 [우주항공시대 밝았다] ③ '인구 100만 우주항공복합도시' 현실화한다 랭크뉴스 2024.05.23
20337 [속보]엔비디아 영업익 8배 성장···10대1 액면분할 결정 랭크뉴스 2024.05.23
20336 묶인채 익사한 고양이, 거꾸로 둥둥…끔찍 학대 터졌다 랭크뉴스 2024.05.23
20335 “암 수술 후 요양병원 입원? 보험금 지급 안돼”… 금감원, 상해·질병보험 주의보 랭크뉴스 2024.05.23
20334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5주기…정치권 김해 봉하로 집결 랭크뉴스 2024.05.23
20333 예비군 훈련 가느라 장학금 박탈…정부 대책, 대학·학생 불만 왜 랭크뉴스 2024.05.23
20332 차도 한복판서 춤추고 요가…SNS 유행에 베트남 골머리 [잇슈 SNS] 랭크뉴스 2024.05.23
20331 아일랜드·노르웨이·스페인,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선언 랭크뉴스 2024.05.23
20330 뉴욕증시, 엔비디아 호실적 불구 연준 의사록에 일제히 하락…나스닥 0.18%↓ 랭크뉴스 2024.05.23
20329 다 주고 떠난 홍계향 할머니‥누리꾼 추모 랭크뉴스 2024.05.23
20328 “5월 금통위가 중요하다”던 한은, 오늘 기준금리 결정…올해 성장률 눈높이 올릴 듯 랭크뉴스 2024.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