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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4시,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2024 한강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린 서울 반포한강공원. 참가자들은 분홍색 매트에 앉아 무념무상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부좌를 튼 채 명상을 하는 참가자도 보였다. 대회장에 놓인 게시판에는 “야근하느라 지쳐서” 등 갖가지 참가 사유가 적혀 있었다. 공공의료를 전공한 데이터 애널리스트 개럿 앵(42)은 “잠시나마 멍을 때리는 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아들에게 말하고 싶다”고 적었다.

12일 오후 서울 잠수교에서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2024 한강 멍 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는 쇼트트랙 전 국가대표, 환경미화원, 119 구조대 등 다양한 직군의 참가자가 90분간 멍을 때렸다. 장진영 기자

대회를 주최한 서울시에 따르면 이날 대회에는 총 80팀이 참가했다. 경쟁률은 35대 1이다. 환경미화원, 쇼트트랙 전 국가대표, 시니어 모델 등 다양한 직군의 종사가 참여했다. 1시간 30분 동안 어떤 행동·생각도 하지 않고 최대한 오래 멍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규칙이다. 웃거나 졸거나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등 행위가 걸리면 탈락이다. 1시간 30분 버티기에 성공한 이들 가운데, 15분 마다 체크한 심박수와 현장 시민투표를 종합해 우승자를 정한다.

12일 오후 서울 잠수교에서 열린 2024 한강 멍 때리기에 참가한 미국인 데이터 애널리스트 개럿 앵(42)은 "명상에 관심이 있는데 직접 체험해보고 효과가 있는지 주변 의사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참가자들이 멍을 때리려는 이유는 다양했다. 패션디자이너 김경택(27)씨는 “지난주 퇴사를 하면서 걱정이 많아 불면증까지 생겼는데 여러 잡념을 떨치고 싶다”고 말했다. 중학생 이부건(14)군은 “영어와 수학 시간에 멍을 하도 때려서 선생님께 한소리를 들었다”며 “이번 대회를 계기로 다시는 멍을 때리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했다”고 말했다.

기자도 멍 때리기 대회에 직접 참가했다. 참가 신청서에는 “하루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 9시간 48분, 유튜브 시청 시간 2시간 7분을 기록해 ‘도파민 단식’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긴장된 상태로 각종 사건·사고를 취재하는 사회부 기자로서 멍 때리는 시간이 절실하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첫 심박수는 평범한 수준인 103을 기록했다.

주최 측이 준비한 ‘멍때리기(氣) 체조’를 마친 뒤 90분간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앉은 채 멍을 때린지 30분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허리가 뻐근해졌다. 300명이 넘는 시민의 시선과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도 난관이었다. 가방에 넣어 둔 휴대전화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1시간을 넘기는 시점부터는 그야말로 무아지경. 시민들의 웅성대는 소리마저 멀어져갔다.

다른 참가자들도 갖가지 자세로 멍을 때렸다. 한 참가자는 누워서 입을 벌린 채 멍을 때렸고, 자녀를 안은 채 멍한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다. 대회 중간 “햇볕이 뜨겁다” 등 이유로 기권한 팀도 나타났다. 얼마 후 진행자가 외치는 카운트다운과 함께 아득하고 아늑했던 90분이 지났다.
12일 오후 서울 잠수교에서 열린 멍때리기 대회 기자도 35:1의 경쟁률을 뚫고 참여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사실 휴대전화 금단 증상으로 내적 갈등을 벌이는 중이다. 장진영 기자

이날 우승은 프리랜서 아나운서 권소아(36)씨의 차지였다. 바쁘게 사는 ‘프로 N잡러’로 자신을 소개한 권씨는 “평소에도 멍을 때리느라 지하철 환승 구간을 놓칠 때가 있다. 우승을 하니 심박수가 빨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회는 “우리에게 멍때리기를 허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종료됐다.

멍때리기 대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가치 있을 수 있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기획자 웁쓰양 작가는 “10년째 대회가 주목받는 걸 보면 우리 삶이 여전히 바쁘고 멍 때리기가 어렵다는 방증 같다. 그래도 최근엔 가족 단위 참가자도 늘어서 멍 때리기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초(超)경쟁, 극한 갈등 사회에서 무언가로부터 단절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반영된 현상”이라며 “재미 요소도 겹쳐 오랫동안 멍 때리기 대회가 인기를 끄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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