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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
‘부디’로 시작하는 항소이유서

피해자, 선친 지인에게 10억 투자
약속한 분야 아닌 다른 곳에 전용
오랜 미국 생활, 맥락 이해 어려움
‘처벌 불원’ 오해…피고인 무죄 선고
게티이미지뱅크

“부디 한국어에 서툴고 복잡한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표현이 어려운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 최선을 다해 전달하고자 하였던 진술의 전체 맥락을 세심히 살펴 고려해주십시오.”

후배 검사들의 교육용으로 쓸 항소이유서 샘플을 찾기 위해 과거 파일을 뒤지던 중 어느 항소이유서의 낯선 문장에서 멈춘다. ‘부디… 고려해주십시오’라고? 평소의 나라면 ‘고려해야 합니다’라고 썼을 것이다. 항소이유서는 1심 판결의 오류와 부당성을 지적하는 당위와 논리의 문장으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검사가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다. 약 5년 전 간절한 항소이유서를 쓰던 그때로 훌쩍 기억을 되돌렸다.

같은 한국말 써도 알아듣기 어려워

피해자는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여성이었다. 오래전에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았던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고국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간의 재산을 물려받아 그에 대한 일들을 처리할 겸 해서다. 그사이 고국은 많이 변해 있었다. 남루하고 꼬질꼬질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입성이며 생활이 어떤 면에서는 미국보다 더 세련되어 보였다. 모든 것이 빨랐고 편리한 듯하면서도 복잡했다. 사람들이 쓰는 말과 말투도 모두 조금씩은 변해 있어서 같은 한국말을 쓰고 있는데도 종종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런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오랜 인연이 있다는 ‘송 사장’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처리해야 할 복잡한 행정 서류를 대신 봐주기도 하고 서울의 뒷골목 어디에 남아 있는 추억의 음식 가게로 안내해주기도 했다. 송 사장은 그녀에게 익숙한 옛날의 말투로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리웠던 만큼 낯선 고국에서 그녀는 은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송 사장은 사업 하나를 제안했다. 몽골에서 발전소 사업을 하는데 투자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 에너지 사업이 전망이 좋다고 말했었다. 이것은 선친의 유언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송 사장의 말에 그녀는 거금 10억원을 몽골의 발전소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이런 일은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며 송 사장이 써온 계약서에 서명도 한다. 10억원은 그날로 송 사장이 세운 법인에 송금된다.

10억원을 송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 사장이 새로운 계약서 하나를 내밀었다. 계약서는 처음 썼던 계약서와 거의 같고 조금 달랐다. 사업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쓴 것이라는 송 사장의 설명에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서명했다. 2차 계약서를 받아 든 송 사장이 이번에는 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누님, 몽골이라는 나라에서 사업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언제 이게 완성이 되어서 수입이 날지 모르거든요. 근데 이쪽이 또 요즘 한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서 연예인 사업이 전망이 밝아요. 우선 발전소 될 때까지 연예인 사업을 해보면….”

“아뇨. 저는 아버지 뜻에 따라 에너지 사업을 하려는 거예요. 당장 수입이 나지 않는 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업은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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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진실 입증’해야 하는 숙제

송 사장이 제안한 다른 사업에 대해서는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거절했다고 법정의 증인석에 앉은 피해자는 증언했다. 몽골 발전소 사업 명목으로 송금했던 10억원은 이미 송 사장의 다른 사업 자금으로 다 넘겨진 뒤였다. 에너지 사업 외의 다른 사업에 투자하는 것에 피해자가 동의한 것인지가 쟁점이었는데, 2차 계약서에 추가로 기재된 ‘몽골 에너지 사업 및 그 외의 사업에 투자한다’는 문구가 문제였다.

“혹시 통역이 필요합니까?”

증인석에 앉은 그녀에게 재판장이 물었다.

“아뇨, 저 한국말 알아요. 문제없습니다.”

오랜 외국 생활로 한국말이 다소 서툴러지기는 했어도 엄연한 한국 사람인데, 통역이라니…. 당치 않다는 듯 그녀는 단정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증인신문은 내내 겉돌았다. 같은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문화적·사회적 맥락이 모두 낯설어진 상황에서 말은 자주 엉키고 미끄러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증인, 피고인의 법인에 투자한 10억원은 어디서 나온 돈이죠?”

“그 돈이요? 제 지갑에서 나왔죠. 제 계좌에서….”

선친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돈이기에 선친의 뜻에 따라 에너지 사업에만 투자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질문이었으나 증인은 문언 그대로 대답한 것이다.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질문을 수정하고 반복하기를 수차례, 증인신문은 갈수록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다.

“2차 계약서를 증인이 다 읽어보고 서명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몽골 에너지 사업 외에 그 밖의 사업에도 돈이 들어간다는 것을 증인이 알고 동의한 것 아닙니까. 증인, 한글 읽고 이해하는 데 문제없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제가 읽고 서명한 것은 맞는데요….”

증인신문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검사와 변호인으로부터 쏟아진 질문 세례를 받아내느라 거의 기진맥진한 증인에게 재판장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증인, 피고인의 처벌을 원합니까?”

반쯤 넋이 나간 듯한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처벌… 지금 그 말을 제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퍼니시(Punish)!”

“퍼니시…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묻는 건지…. 저는 그러니까… 퍼니시 문제가 아니고 우선은 제 돈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목적이고요….”

“그러니까 증인은 피고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말이네요?”

변호인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낚아챘다. “네…” 하고 증인은 정답을 확신하지 못하는 학생처럼 자신 없이 답했다. 이 부분이 판결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을까. 미묘하고도 애절한 피해자의 눈빛이 담고 있던 수많은 의미들은 오롯이 전달되었을까. 훗날 받아든 무죄 판결문에는 꼭 짚어 그 때문이라고 쓰여 있지 않았지만 검사로서는 어쩐지 애타던 증인신문의 순간이 자꾸만 떠올라 속이 쓰렸다. 그것이 내가 “부디”로 시작하여 “고려해주십시오”로 마무리되는 애절한 항소이유서를 쓰게 된 이유다.

재판 환경이 변화하고 각종 디지털 증거들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우리 형사 재판의 상당 부분은 진술에 의해 이루어진다. 같은 일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맥락에 따라, 듣는 이의 의지에 따라 다 다른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서 말에 기대어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더디고도 예민한 일이 된다. 그럼에도 과거의 어떤 시간들은 진술에 의해서만 복원되고, 그 말의 결을 잘 살려 입증의 세계로 데려가는 임무는 검사에게 있다.

그 임무를 어떻게 하면 잘 수행할 수 있을까. 후배 검사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교육용 샘플 폴더로 항소이유서를 옮겨 담는데, 온통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애써 말을 고르던 그녀의 모습이 오랜 체기처럼 명치에 걸려 있다.

대구지검 부장검사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9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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