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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사람들

랭크뉴스 2024.05.11 13:46 조회 수 : 0

[한겨레S] 김금희의 나의 폴라 일지
남극의 세미나

날씨 예보에 만전 ‘기상대원’
‘옆새우’에 빠진 생물팀 연구자
포르투갈에서 온 대기과학자
‘구름’이라는 멋진 이름 가져
대기관측소 옆에 있는 카밀라 박사의 ‘밭’. 대기 중으로 토양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관측하는데 이는 오존층 연구에 필수적인 정보였다.

남극 체류로 인한 신체적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건조증이었다. 가려워서 긁다 보니 상처가 깊어졌고 연고와 보습제를 발라도 낫지 않았다. 고민하던 나는 잘 씻지 않는 것을 택했다. 벡터는 일과가 끝나는 밤이면 운동을 하고 샤워까지 마친 촉촉한 머릿결로 휴게실에 나타났지만 나는 세수를 하고 발바닥을 물에 적시는 정도로 청결도를 유지했다. 가려움은 정말 참을 수 없으니까. 또 하나 불편한 건 숙소의 추위였다. 바다를 향해 난 내 방은 위버반도의 빙벽을 조망하는, 값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스위트룸 전망이었지만 그래서 추웠다. 아무리 단열에 강한 창도 밤을 맞은 남극해의 찬 기운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맞은편 방 사람들은 밤에도 춥지 않고 심지어 엠(M)은 반팔을 입고 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플리스 집업을 입은 채 잠이 들었고 어느 밤에는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으스스한 한기에 놀라 딸꾹질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오기 전에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건강했다. 전날 아무리 피곤해도 일어나면 피로가 풀려 있었고 많이 걸어서 그런지 몸도 가벼웠다.

연구 대상인 공기를 닮아 말간 얼굴

실험실에 잘 정리돼 있는 플라스크들.

화요일 아침 아무도 내려와 있지 않은 웨트랩(자연과학 실험을 하는 연구실)으로 들어가 실험실 설비들을 살펴보았다. 정보를 캐내려는 스파이처럼 조심스럽게. 누군가의 책상을 살펴보는 건 약간 황송한 일이니까. 과학자들이라면 일상적으로 사용할 기구 하나하나가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지 잘 씻어 엎어놓은 삼각플라스크들에 대해서라도 수십장의 글을 쓸 수(물론 의욕만이지만) 있을 것 같았다. 전극이 흐르는 센서에 붙들린, 어제 팀원들과 함께 채취한 낫깃털이끼와 솔이끼를 지켜보다가 뒤돌았더니 알 수 없는 생물들이 가득한 플라스틱 채집통이 보였다. 펭귄과 스쿠아 그리고 지의류 등만 만나온 내 눈에 포착된 또 다른 남극 존재였다.

에이는 부두 및 남극해에서 발견한 생물들을 플라스틱 채집통에 보관하고 있었다.

“선생님, 이건 뭘까요? 사진 찍어도 될까요?”

마침 카밀라 언니가 실험실에 들어왔다. 언니는 가장 늦게까지 실험실을 지키고 가장 일찍 일어나 실험 스폿으로 떠나는 과학자였다. 내 힘으로도 가뿐히 들 수 있을 것처럼 여린 체구이지만 언제나 눈빛은 반짝였고 머릿속이 늘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을 잘 챙겼고 다감했으며 얼굴이 말갰다.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언니의 전공 분야인 대기, 그러니까 공기를 닮아 있었다. 종일 바깥에 나가 있는 언니가 돌아오면 사람들은 ‘밭’에 잘 다녀왔냐고 묻곤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연구 과제가 정말 작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밭은 언니가 머물며 토양에서 대기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 변화를 관측하는 장소였다. 대기관측동 옆이었고 언니가 관측하고 있으면 매일 찾아와 구경(?)하는 스쿠아도 있다고 했다. 하도 만나다 보니 안 나타나면 슬며시 궁금해진다고.

“아 거기는 생물팀 에이(A) 책상이에요. 저분!”

복도를 걸어오고 있는 에이에게 다가가 책상 사진을 써도 될지 묻자 그는 쑥스러워하며 “그냥 바다에 보여서 채집해둔 건데, 쓰셔도 돼요” 했다. 일주일간 한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도 나처럼 수줍음이 많은 것 같았다. 언제 또 과학자의 실험실을 보게 될까 부지런히 기록으로 남긴 다음 식당으로 내려가 잡채밥을 맛있게 먹고 아시안컵 경기를 봤다. 경기는 잘 풀리지 않았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식당 모니터에도 버퍼링이 일었다.

“2002년 같으면 ‘이역만리 남극에서도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하고 뉴스에 나왔을 텐데.” 월동대원 중 하나가 아쉬워하자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팔을 흔들어 한국에 수신호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리가 끝까지 응원했다고요, 하고.

“구라청·오보청, 잘 알고 있어요”

오후에는 드디어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연구대를 통솔하는 수석연구원의 강력한 의지 아래 만들어진 이 세미나의 주제는 한마디로 ‘나는 왜 남극에 왔는가’였다. 연구동 2층 휴게실에 의자를 둥글게 모아놓고 과자와 음료수도 잔뜩 쌓아놨다. 편하게 바닥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경청이 주 임무이므로 가장 앞자리에 앉았고 발표자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겠지만 태블릿 피시로 사진을 찍어댔다. 사실 과학자들도 자기 영역 외에는 잘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왜?”라는 의문을 품으면 홀린 듯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분위기는 금세 진지해졌다. 첫 주자인 기상대원의 발표부터 놀라웠다. 때로 기상청에서는 지금의 예보가 지역 경제 활성화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고민하며 예보문을 작성한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휴가철 약하게 비가 올 가능성이 있을 때 강수의 양을 어떻게 표현해야 사람들이 휴가를 취소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사람들의 심리란 말 한마디에도 영향을 받으니까.

세종기지 연구동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기상대원이 기상 예보를 위한 하루 일과를 설명하고 있다.

기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기상대원의 예보는 우리의 하루를 결정하는, 나아가 우리의 안전을 좌우하는 정보였다. 안광이 빛나고 수염을 길러 어딘가 신비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기상대원은 하루 네번 정규 기상 관측을 한 다음 아침과 저녁에 인트라넷을 통해 기상 예보를 전송했다. 그리고 수시로 빙산, 유빙의 위치, 구름의 종류 등을 쌍안경으로 관측해 날씨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기상청 업무가 낮과 밤이 뒤집혀 있고 야간 근무 강도가 높아 돌연사 확률도 높다는 얘기에는 숙연해졌다.

“구라청, 오보청, 하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지에서는 좀 더 노력하고 있어요. 맑은 날의 가치는 여기서 더 중요하니까요.”

하기는 날씨 예측이란 미래를 점치는 일이나 다름없지 않나. 옛날 같으면 신내림 받은 무당이나 도력 높은 도사들이나 맡았을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슈퍼컴퓨터의 예측 모델에 기대를 걸어도 지금 기술로는 3일 이후의 날씨를 정확히 맞히는 건 세계 어느 나라도 불가능하다고 하니 일진 나쁜 오늘의 탓을 기관에 돌리는 건 그만해야지 싶었다.

그리고 여러 분야를 지나 실험실에서 만났던 에이가 등장했다. 제목부터가 시선을 끌었는데 ‘새우 아니죠, 옆새우입니다!’였다. 옆새우(Gammarus)는 단각목에 속하는 절지동물로 1만여종에 이르는 개체가 있는데 남극 바다에도 살고 있었다. 물고기 아가미에 달라붙어 먹이를 얻기도 하고 죽은 해양 동물도 분해하며 조류 같은 해양 식물과 공생하기도 한다. 해안 바닥에 사는 생물 가운데 가장 개체량이 많은 존재이지만 이상하게도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고 했다. 서식 환경과 생활 양식이 알려진 종도 아주 소수이고 유전 정보도 거의 전무한 바닥 생물계의 ‘유니콘’이었다.

생물팀 연구원 에이(A)가 옆새우와 새우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일단 옆새우를 채집하면 스케치를 하면서 모양을 정확히 살피는데요. 저는 그렇게 옆새우를 그리는 게 좋아서 연구까지 하게 됐어요. 다 똑같아 보여도 자세히 보면 다 다른 종이고 수심 25m 표본에서 직접 새로운 종을 발견하기도 했거든요.”

미보고된 종을 처음으로 발견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했다. 그건 창조에 가까운 일일 것 같으니까. 옆새우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가 시급한 건 옆새우 또한 기후변화로 멸종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알아차리지 않으면 아예 없었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안타까웠다. 나는 남극에 있는 동안 에이를 통해 옆새우 곁으로 좀 더 가까이 가봐야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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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회 회식, 엄격한 알코올 통제

원래는 하루에 끝내기로 했지만 세미나 분위기가 워낙 뜨거워 다음날까지 이어가기로 하고 세종회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세종기지에서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음주가 가능한 회식이 열리는데,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기도 했다. 첫 회식 때는 낯설어서 “저는 술은 한잔도 못 마십니다” 했던 나는 문득 술이 당겼다. 셰프가 내놓은 골뱅이 소면이 너무 맛있어서였을 수도 있다. 맥주를 마시다 보니 누군가 선물로 가져온 양주가 등장했고 다른 모든 술처럼 모두에게 똑같은 양이 배급되었다. 기지에서 알코올의 제한은 아주 철저했다. 음주할 수 있는 날과 시간, 그리고 양 모두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창고 열쇠를 쥔 총무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작가님, 이 잔은 꼭 드셔야 해요. 꽤 유명한 양주거든요.”

엘(L) 박사가 큰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맥주 이외의 술은 즐기지 않지만 그 말에 잔을 들었고 이내 나는 수백년 된 위스키 오크통 안에 들어간 듯한 황홀감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준 엘 박사에게 고마울 정도였다. 술이 오른 나는 기지에 와 있는 포르투갈 연구자들에게 다가갔다. 아침마다 커다란 풍선을 띄워 대기를 관측하는 그 팀은 세명의 과학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샘 해밍턴처럼 푸근한 인상의 클라우디우가 이름이 정확히 뭐냐고 물었다.

“김금희야.”

“그럼 너는 스퀘어야?”

스퀘어? 지금 내 얼굴형이 각이 졌다는 건가, 괜히 찔려 하며 무슨 의미냐고 묻자 클라우디우는 수첩을 꺼내 ‘Claudio’라는 자기 이름 밑에 ‘구름’이라고 썼다. 그리고 ‘르’ 밑을 동그라미 쳤다. 한글 공부 중인 클라우디우는 내 이름의 자모가 미음이냐고 물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알려주고는 클라우디우에게 정말 멋진 이름이라고 감탄을 보냈다. 대기과학자 이름이 ‘구름’이라니 이건 소설가 이름이 ‘소설’ 혹은 ‘명작’인 것과 같지 않은가. 클라우디우의 부모님은 아이의 장래를 어떻게 내다보고 이런 근사한 이름을 지었을까?

“나 사실 네 책상 위의 펭귄 인형을 봤어.” 나는 아주 귀엽더라며 칭찬했다.

“아, 그는 내 친구야. 모든 여행에 함께 다녀. 사람들한테 들으니 너는 매우 매우 매우 유명한 소설가라지?”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손까지 내저었다.

“한국의 조앤 롤링 아니야?”

내 소설에는 해리 포터도 덤블도어도 나오지 않지만 구름씨는 대화하면 할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맑은 날 뭉게뭉게 차오른 구름의 이동에서 눈을 뗄 수 없듯이, 그 밤 우리의 대화가 길어졌다.

글·사진 김금희 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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