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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빌라촌서 마주친 ‘비밀의 화원’ 누구일까, 여기 마음 쏟은 이
| 이다|일러스트레이터

쓰레기 더미만 보이던 주택가빌라 담장에 모란꽃이, 건물 사이에 흰 백일홍이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활짝누군가 공 들여 돌본 흔적아직 인류애가 있구나 느끼게 해나도 현관에 화분을 내놓아볼까

“오늘은 어디로 가지?”

매일 똑같은 동네에서 똑같은 고민을 한다. 어디로 갈지는 내 맘이다. 지나가는 어르신이 나를 힐끔 본다. ‘저 처자는 벌건 대낮에 일도 안 하나’ 하는 눈빛이다. ‘나는 프리랜서라고요!’ 속으로 항변해 봤자 소용없다. 한낮에 ‘추리닝’을 입고 어디 뭐 재밌는 거 없나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모습이 누가 봐도 100% 동네 백수다.

오르막길을 올라 동네 뒷산 입구 쪽으로 가본다. 이곳에는 5층짜리 나지막한 빌라들이 여러 동 있다. 빨간 벽돌을 쓴 것을 보니 1990년대 이전에 지어진 것 같다. 담장에 걸린 알록달록한 빨래, 개똥을 버리지 말라는 분노의 경고문을 눈으로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응?”

뭔가 대단한 붉은 것이 시야에 살짝 스쳤다. 지나가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획 돌렸다. 이럴 수가. 모란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모란이다.



홀린 듯이 가까이 가보았다. 빌라와 빌라 사이의 작은 공간, 한 평도 안 될 공간에 모란이, 아니 모란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하나, 둘, 셋…. 만개한 모란이 족히 40송이도 넘는다. 모란은 운현궁에서 본 것보다 크다. 158㎝인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다. 보통 모란은 기껏해야 80㎝ 정도의 나지막한 것만 봤는데 이건 내가 모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란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압도적이다. 자주색에 가까운 붉은색의 모란 꽃잎은 마치 벨벳처럼 부드러운 윤기가 흐른다. 가운데 펼쳐진 노란 수술은 마치 왕족이나 달았을 법한 화려한 브로치 같다. 그리고 누가 모란이 향기 없는 꽃이라고 했나? 바람이 불 때마다 진하고 시원한 향기가 코에 가득 들어온다. 나는 벌써 10분 동안 이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모란을 이 동네 사람만 봐도 되나? 관광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옆을 보니 말려 있는 긴 호스가 보인다. 물이 가득 담긴 대야도 보이는데 아마 빗물일 것이다. (정원사들의 말에 따르면 식물에 제일 좋은 물은 빗물이라고.) 모란나무 아랫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가 제법 굵고 단단하다. 멋지게 가지치기가 되어 있고, 지지대로 단단히 묶어 수형을 잘 살렸다. 운현궁 모란나무 못지않게 사랑과 관리를 받는 녀석인 것 같다. 모란은 정말 잠시 핀다고 한다. 일주일도 채 꽃을 못 본다고 하는데 그 잠깐을 위해 누군가는 1년간 공을 들였다. 자기만 보려고 울타리를 치지도 않았다.

이번엔 언덕 아래로 내려가 본다. 한참을 내려가 지하철역으로 가는 골목에 또 모란이 보인다. 아까 본 압도적인 모란과 달리 쓰레기가 잔뜩 쌓인 골목길 철창 너머 낡은 플라스틱 통에 피어 있다. 주변 환경은 아름답지 않지만, 모란의 자태를 보면 황송하다. 그냥 봐도 되는 걸까? 무릎이라도 꿇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동네를 관찰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어디에 무슨 화단이 있는지 빠삭해졌다. 새절역 근처의 한 교회 앞에는 아치로 만든 장미화단이 있다. 여름엔 풍선꽈리도 열린다. 그 근처 어느 왕의 이름을 딴 부동산 앞에는 벼를 키우고 있다. 최근에 새로 도색을 한 나홀로 아파트와 붉은 벽돌의 빌라 사이에는 하얀 백일홍이 피는 한 평짜리 정원이 있다. 이 모든 곳은 관에서 만든 것이 아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땅 한 뙈기를 내버려 두지 못해 가꾸는 것이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민간정원? 셀프화단? 주민 자율화단? 갑자기 ‘이타적 화단’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내가 사는 새절역과 응암역 사이는 빌라로 빼곡히 차 있다. 예전에는 주택이 많았던 곳인데 점차 다세대와 빌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빌, ○○맨션, ○○하우스, ○○빌리지, ○○빌라, ○○주택, ○○파크맨션…. 빌라촌은 삭막하다. 빌라 입구에 심어진 나무는 십중팔구 말라 죽어 있고, 그게 아니면 모가지가 싹둑 가지치기 되어 있기 일쑤다. 간신히 살아남아 있는 나무 밑에 담배꽁초가 수북한 걸 보면 인류애가 사라진다. 좁은 골목에는 배달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고 집 앞마다 먹다 남긴 배달 용기며 부서진 가구 같은 쓰레기가 대충 버려져 있다.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S빌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빌라 앞은 다르다. 이 동네에서 가장 대단한 화단이 그곳에 있다. 식물 한 가지만 빼곡하게 심는다든지 일렬로 팬지나 꽃양배추 같은 것을 배치하는 흔한 관공서표 화단과는 차원이 다르다. 2m가 넘는 새하얀 산수국 나무와 싱싱한 동백나무, 그보다는 작지만 제법 큰 철쭉나무와 단풍나무가 가운데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는 가운데 화단은 완벽한 색상의 균형을 이룬다. 중간 부분은 장미와 수국과 철쭉이, 아랫부분엔 샐비어, 매발톱꽃 등 작은 꽃들이 자리한다. 화단의 빈 곳은 족두리꽃과 접시꽃, 남천이 메꾸고 있다. 화단에 심어진 꽃 종류만 해도 족히 30가지가 넘는다. 봄에서 가을까지 번갈아 가며 꽃을 피운다. 시들시들한 꽃은 하나도 없다. 다들 완벽히 케어받은 상태다. 매일 꼼꼼히 관리하지 않으면 이런 상태는 절대 될 수 없다.

궁금해서 인터넷 지도로 거리뷰를 찾아보았다. 2010년 중반까지도 이곳은 주택이었다. 그러다 2013년 후반 빌라 분양이 시작되었다. 이때는 건설사에서 대충 만들어놓은 허접한 철쭉 화단이 있었다. 그것도 반쯤 말라 죽어 있다. 그러다 2017년의 거리뷰를 보니 내가 아는 그 화단이 시작되고 있다. 3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대체 누가 허접한 화단을 보다 못해 팔을 걷어붙인 걸까? 2017년 거리뷰에서 보이는 철쭉, 접시꽃, 장미, 산수국은 지금은 두 배 이상 커졌다.

S빌 화단이 있어 이 길을 지날 용기가 난다. 누군가가 뱉은 가래침과 반쯤 남은 채 버려진 테이크아웃 컵, 찢어진 과자봉지와 그걸 먹겠다고 달려드는 새까만 비둘기들을 볼 때 나는 이 화단을 생각한다. “조금만 더 가면 S빌 화단 나오니까 참고 가자.” 그리고 S빌 화단에 도착하면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마치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시달리다 휴게소에 들른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누군가가 온 정성을 다해 만들어놓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공짜로 눈에 담고, 마음에 채우고 다시 출발한다.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내 바로 옆으로 스쳐 가도 오늘은 화내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도시의 비좁은 틈에 꽃을 기른다. 먹을 수도 없고 돈이 되지도 않는 꽃을 정성스레 기른다.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공유하기까지 한다. 나는 그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계절의 꽃을 볼 수 있다. 누군가가 마음을 쏟은 화단을 보면 ‘아, 세상에 아직 이렇게 이타적인 사람들이 있다니’ 하며 이 사회에 대한 믿음마저 샘솟는다. (오버라고? 진짜다.)

한때 지자체들이 쓰레기 무단투기를 막기 위해 골목 중간중간 화분을 놔두곤 했다. 화분이 있으면 사람들이 거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을 거라 기대했다. 퍽이나. 사람들은 화분에 담배꽁초를 눌러 끄고, 먹다 남은 커피를 버렸다. 곧 화분까지 쓰레기통이 되어버렸다. 화분만 덜렁 놔두고 관리를 하지 않으니 유지될 리가 없다. 그런데 아주 적은 확률로 성공한 곳도 있다. 그 앞에 사는 사람이 직접 돌본 곳이다. 꽃이 죽으면 새로 심고, 꽁초를 버리면 하나하나 치우면서 자신만의 화단으로 만들었다. 이런 화단은 쓰레기가 범접하지 못할 아우라를 내뿜는다. 쓰레기를 들고 갔다가도 화단의 기세에 밀려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날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동네의 이타적 화단을 돌아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는데 건물 앞에 활짝 핀 노란 꽃 화분이 있다. 아래엔 메모도 붙어 있다. “꽃이 피었어요. 같이 보고 싶어 잠시 여기에 둡니다.” 천사가 다녀갔나? ‘같이 보고 싶어서’라는 말이 머리를 때린다.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집 안으로 들어와 베란다에 놓인 수국 화분을 본다. 종로꽃시장에서 사 온 지 한 달째 파란색 수국이 피어 있다. 내일은 나도 현관에 화분을 내려놓아 볼까?

▶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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